<아미엘 인생일기>,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은유 <해방의 밤>
오후 아르바이트에 가서 연하게 커피를 타 마신 게 원인인 것 같다. 날을 거의 홀딱 샜다. 40여 분동 안 겨우 쪽잠을 잤는데 짧은 꿈 세 개를 꿨다. 새벽 4시에 잠들어 4시 42분 알람을 듣고 일어나기가 가능하냐고 묻는 다면 가능하다.
왜???? 나는 새벽독서 18일 차를 시작해야 하니까. 다시 1일 차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니까.
차라리 잠이 오길 뒤척이는 시간에 전시용으로 책장에 꽂아둔 <총균쇠>를 읽었으면 바로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새벽에 5시에 일어나서 하는 독서가 진짜 새벽독서다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으로 빨리 자자는 마음으로 뒤척이기만 한 4시간. 참 바보 같지만 그래도 일어나서 책상에 앉은 나 자신을 칭찬하는 긍정회로를 돌리며 오늘의 독서를 시작한다.
어쩌다 보니 휴대폰 화면의 날짜와 시계를 인증하는 게 나의 시그니처처럼 되어가는 것 같은데 1분이라도 빨리 새벽 5시 전에 책상에 도착하기 위한 강제적 수단으로 아주 효과가 있다. (나의 새벽독서를 함께하는 귀여운 시계와 타이머)
내게 읽어야 할 책으로 지목되어 하루 몇 장씩밖에 못 읽히는 1041 페이지짜리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의 <아미엘 인생일기>를 읽어보자.
1851년 12월 2일의 일기는 "비밀의 법칙"이라는 다섯 음절로 시작한다. 그가 말하는 비밀의 법칙은 다음과 같다.
"비밀의 법칙. 식물처럼 하라, 사상이든 감정이든 네 안에 싹트는 모든 것은 어두운 곳에서 보호하고, 완성된 뒤가 아니면 밝은 곳으로 꺼내지 말라. (중략) 성장하고, 생활하고 싶다면 너의 뿌리를 드러내지 말라. 가능하다면 탄생하는 날에도 여왕들이 하는 것처럼 입회할 사람들을 부르지 말라. 알프스의 용담초처럼 오직 신의 눈 아래에 피어라." (면 61)
이 말의 뜻은 뭘까? 직설적으로 말하면 '섣부르게 행동하지 마라'라는 이야기인 것 같다.
뭔가를 시작하면서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설레발을 치는 경우, 그러다 일을 그리치는 경우도 많다.
조용히 내실을 다지는 시간, 내 안의 사상, 감정, 꿈을 싹 틔우는 불가결한 시간을 남들에게 알아봐 달라고 떠벌이지 말자. 그저 묵묵하게 해내자는 마음을 먹어본다.
아미엘은 성장을 포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산다는 것은 또 무엇인지 일기에 써 내려간다.
"성장을 멈춘 자는 이미 노화하기 시작한다. 중간에 그만두는 자는 단념한다. 정체 상태는 마지막으로 가는 시작이며, 죽음의 전초가 되는 무서운 조짐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이겨내는 것, 우리의 물질적-정신적 존재의 절멸, 질병과 퇴영 (退嬰)에 대해 자기를 긍정해 가는 것이다. 따라서 산다는 것은 쉬지 않고 소망하는 것, 또는 날마다 자신의 의지를 새로이 하는 것이다." (면 61)
오늘 새벽에 잠을 못 자고 날을 새면서 나는 18일 차 새벽독서 루틴을 지키지 못할까 겁났다.
잠을 못 자서 오늘 하루 새벽독서를 포기하거나 혹은 새벽독서를 하지 않고 했다고 나 스스로 속이고 나의 글벗들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이겨내는 것"이라는 말처럼 우리의 삶은 그저 쉽게 흘러만 가는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살아오면서 많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나 스스로 성장하는 기회로 삼겠다고 시작한 새벽독서다. 고작 졸음 때문에 포기하고 18일 만에 들어 눕는다면 앞으로 내 인생에 있어 닥칠 여러 크고 작은 고난을 어찌 내가 이겨낼 수 있겠는가.
부족한 수면시간 따위 내 성장을 주저앉히기에 얼마나 하찮은 변명거리인가.
아미엘은 자신의 일기에 대한 고마움을 적는다. 일기를 쓰면서 울분이 사라지고 마음이 가라앉았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우리 역시 화나고 속상한 일을 글로 풀어쓰다보면 딱딱하게 굳어있던 돌덩이 같던 마음이 내 손 안에서 글자 하나하나로 문질러지고 비벼지며 거품처럼 내 마음을 씻어내는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남이 읽어주기를 바라고 쓴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을 달래고 스스로 생각하기 위해 쓴 것이다. 나의 과거에 놓은 징검돌이다. 그중에는 징검돌 대신 무덤의 십자가도 있고, 돌 피라미드도 있으며, 초록빛 나뭇가지도 있고, 하얀 자갈도 있고 메달도 있다. 그것들 모두가 마음의 천당이 되어 길을 찾는 데 도움을 준다. 자신의 길에 순례의 이정표를 세워 두면, 자신의 사상과 눈물과 기쁨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나의 여행기이다.". (면 65)
나도 40여 년 동안 일기를 꾸준히 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지난 고난의 시절에는 연필 한 자루조차 잡기 힘들었다.
굳이 내 감정을 들춰내 "일기"라는 기록으로 만드는 것이 내 몸과 정신에 타투처럼 새겨질까 두려웠다.
어쩌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도 훗날 나의 일기로 남겨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미엘이 이 일기가 본인 이외에도 "마음의 행로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면 65)에게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처럼.
나 또한 나의 이 새벽기록이 누군가에게 읽히며 가치 있어지길 소망해 본다.
소박하고 간소한 삶을 지향하는... 요즘 "미니멀리스트"의 조상님이라 부를 수 있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손수 오두막을 짓고 월든 호숫가에서 2년 넘게 자급자족으로 살아오면서 써 내려간 이야기를 읽어본다.
<월든>
어제 옷에 대한 소로의 이야기를 읽고 주말까지 겨울옷과 봄옷을 정리하고 더 이상 불필요한 옷을 사진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오늘은 소로가 어떤 이야기를 내게 들려줄까?
"우리는 사치품에 둘러싸여 있지만, 수많은 원시적 안락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가난하기 짝이 없다. (중략) 우리의 집은 옮기기가 불가능한 재산이니까 우리가 집에 살고 있다가보다는 오히려 갇혀 있는 경우가 더 많고, 우리가 피해야 할 나쁜 이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비열한 자아일 경우도 적지 않고 보면, 이 비난은 지금도 타당할 수 있다. (중략) 그들은 죽어서나 집이라는 감옥에서 해방될 것이다."
아이코, 소로가 오늘도 내 명치에 정신의 주먹을 날린다.
무리해서 지은 집 때문에 대출금의 노예로 사는 내 삶을 어찌하셨을고.
"문명인이 천박한 생필품과 육체적 안락을 얻기 위해 생의 대부분을 보낸다면, 그가 굳이 미개인보다 더 좋은 집을 가져야 할 까닭이 있을까. (중략) 한 계층의 호화로운 생활은 다른 계층의 궁핍한 생활로 균형이 맞추어 진다. 한쪽에 궁궐이 있으면 다른 한쪽에는 구빈원과 '침묵하는 빈민'이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다 더 편리하고 호화로운 지을 짓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집을 지을 여력이 없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왜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만 노력할 뿐, 더 적게 가지고도 만족하는 법을 배우려 하지 않을까? (중략)
오늘날 우리의 집들은 가구로 넘쳐나고 잔뜩 어질러져 있어서, 현명한 주부라면 그 대부분을 쓰레기 구덩이에 처넣는 것으로 아침 일을 마쳐야 할 것이다. 아침 일! (중략)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아침 일'이란 무엇일까? (중략) 인간은 이제 자기가 쓰는 도구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면 49, 면 50)
내 인생에 5년 전쯤 이 책 <월든>을 만났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런 집을 지을 여력이 없다는 사실"을 내가 직시해서 집을 지어서 같이 살자는 시아버님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을 텐데.
하지만 이제 와 후회하면 무엇하리. 다시는 이런 일을 자초하지 말아야겠다.
(사실 며칠 전에도 무모한 시도, 과욕을 부리려다가 꼬꾸라졌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 이야기는 곧 <알알샅샅이 기록한 하루> 연재에서 써보겠다.)
적게 가지고도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본인이 스스로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 같다.
자꾸 외부의 것, 물질로 자신의 헛헛함을 채우고 과시하려는 태도는 가계경제의 악순환은 물론 물질의 노예로 살아가며 "자기가 쓰는 도구의 도구"로 전락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니멀라이프를 꿈꾼다.
하지만 나는 엄청난 맥시멈리스트다.
지금도 정신적 우울함으로 과거 소비중독에 빠져 사들였던 옷들과 아이들 전집 세트가 집안 가득 차있다.
신혼 없이 살다 15년 만에 쫓기듯 분가해서 사는 1년 동안 미친 듯이 그릇을 사모았다.
접시하나 물컵하나 내 취향대로 못 가져본 그 세월이 억울해서 그걸 다 보상해주고 싶어서 보이는 대로 샀다.
한 달 내내 마을잔치를 해도 못쓸 만큼 찬장 속에 그릇 세트들을 쟁여뒀다.
언젠가 버젓한 내 집이 생기면 10인용 식탁에 시부모님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친정식구들을 초대해 딱 부러지는 밥한상을 차려 편하게 대접해 줘야겠다는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친정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엄마는 혼자 시골에 계시고 근교에 살던 여동생과 남동생도 멀리 떨어지게 되면서 그 일은 실현되지 못했다.
지금도 찬장 가득한 그릇들을 보면 나의 그릇된 욕심들이 위태위태 쌓여있는 것 같다.
찬장을 열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분명 행복하기 위해 사들인 물건인데 전혀 행복하지 않다.
물질로 행복을 살수도 보상받을 수 없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소로는 '아침 일"이라는 화두를 내게 던진다.
그의 말처럼 나는 불필요한 모든 것들을 싹 다 쓸어버리고 "현명한 주부"가 될 수 있을까?
깨달았으니 뭐라도 실천하는 게 도리겠지. 오늘 '아침 일"로 출근하며 내 손으로 택배상자와 분리수거를 해 봐야겠다.
작은 실천이 모여 작은 성공이 되고 그렇게 날마다 조금 더 나아지는 내가 되겠지.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있던 은유 작가의 <해방의 밤- 그녀의 말, 그녀의 노래>를 읽어본다.
오늘도 그녀의 글에서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찾고 싶다. 그 과정이 기다려진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
오늘은 "그녀의 말, 그녀의 노래"로는 제목으로 성폭력에 대한 글쓰기 수업과 가수 자우림 김윤아의 노래를 이야기가 나온다. 첫 부분에 글쓰기 학우 U가 보낸 메일에 쓰진 "성폭력"과 다른 이의 "데이트폭력" 대한 사례가 이어진다. 가해자가 가족이라 그 피해를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다"는 점,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는 그들의 고백은 마음이 아프다.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상처.
그 상처가 내가 지은 죄가 아님에도 나를 벌주는 것 같은 느낌.
나는 그 감정을 알고 있다.
글에서 자우림 "새"라는 곡이 소개된다. 김윤아가 여성으로서 깊이 상처받았을 때 만든 곡이었는데 그 노래를 만들고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에 새삼 감사했던 기억이 있다고 말한다.
은유 작가는 상처받은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순간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라 자기 삶의 창조자가 된다는 걸 그녀가 알았던 것 같다고 말한다.
음악플레이리스트에서 그녀의 노래를 검색해 틀어본다.
가사와 흐느끼는 곡소리 같은 그녀의 목소리를 증언처럼 듣는다.
자우림 - 새
눈물이 쏟아져 앞을 볼 수 없어.
가슴이 아려와 숨도 쉴 수 없어.
왜, 왜, 왜, 왜 그럴까?
너에게 죽은 새를 선물할게.
너에게 죽은 새를 선물할게.
(...)
나의 회로는 전부 폐쇄됐어.
그래 이제 나는 다 망가졌어.
네가 다 망쳤어.
(...)
너에게 죽은 나를 선물할게.
고마워 고마워 너에게 피 흘리는 새를 선물할게.
그녀의 증언이 아침 공기를 무겁게 채운다.
나도 언젠가는 내가 품고 있는 상처를 이야기하는 "말할 기회"가 주어질까.
그렇다면 나는 움추려들지 않고 나는 잘못이 없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직접 말해봄으로써 '어떻게 말하는지" (면 149)'를 스스로 깨우치게 될까?
그녀들처럼 피해자가 아닌 자기 삶의 창조자로 태어날 수 있을까?
상처를 낙태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잉태되었음을 받아들이고 세상 밖으로 출산해 크게 울음터트릴 수 있을까?
훗날 “말할 기회” 가 나에게 왔을 때 나 역시 그녀들처럼 그랬노라, 증언할 수 있을까….
참고> <매일 읽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 니케북스. 2022 1쇄
참고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열림원 2022. 10쇄
참고> <아미엘 인생일기> 동서문화사 2006. 1쇄
참고> 은유 <해방의 밤> 창비. 2024 2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