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아미엘 인생일기>, 은유 <해방의 밤>
오늘은 특별히 4시에서 6시까지 책 읽고 글 연재하는 게 목표!
새벽 6시부터 8시까지 <엄마의 유산> 글쓰기 프로젝트 회의가 있는 날이기에 새벽 독서 시간을 앞당겼다.
모처럼 6시간을 잤기 때문에 컨디션이 좋다.
커피 맛을 잘 모르는 나라서, 카페에서 커피 시키는 건 일 년에 두세 번뿐이다. 하지만 새벽독서에는 카페인이 불가피하게 필요할 때가 있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어제 날 새고 40여분의 수면상태여서 일할 때 몽롱했다. 뜨거운 커피를 에너지 드링크처럼 들이켰더니 금방 초롱초롱해지길래 역시 카페인의 효능이란! 하며 감탄했다.
평소보다 이른 새벽독서에 마음이 여유롭다. 고양이 쿠쿠, 나나, 강아지 모모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부스럭 거리는 내 소리를 듣고 찾아왔다. 간식 내놓으라고... 새벽 3시 50분인데 얘들아???
오늘은 <매일 읽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 먼저 맛보기로 시작한다.
감성 충전이 조금 필요하다.
소로의 <월든>과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의 <아미엘 인생일기>은 자꾸 나의 명치를 문장으로 때리기 때문에 아프다. 맞기 전에 자연 감성 충전한 소로의 글로 먼저 명치에 쿠션을 대야 한다.
오늘 날짜(3/22)와 같은 1942년 3월 22일 소로의 일기를 읽어보자.
어어.. 이게 아닌데...
"나의 맞수가 실패하면 나도 성공하지 못한다. 인류의 성공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102면)
저기요. 소로 님... 솜방망이 펀치로 명치 때리기 있기 없기?
그래도 인류애 있는 문장으로 덜 아프게 때려주시니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급하게 어제 못 읽은 3월 21일의 일기를 들춰본다. 감성 충전이 필요해~~
"낯설어도 기억에 남을 만한 영향을 받으면 우리는 다시 유연해져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우리 안에 내재한 천재성이 우리를 조금씩 이끌어 갈 것이다. 녹아서 자연스럽게 부드러워진 흙처럼. 우리 내면의 겨울이 부서진다. 나에게서 서리가 빠져나가고, 나는 활짝 열린 도로가 된다. 쌓여 있던 얼음과 눈이 녹아내리고, 예상치 않게 열린 통로로 밀물처럼 사유가 쏟아진다. 나는 힘이 나서 다시 한번 지구라는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101면)
우리는 봄처럼 다시 유연해져서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내재한 천재성이 우리를 이끌어 갈 것이라는 믿음. 내 안의 얼어붙은 서리가 빠져나가 가슴이 열리고 그 안이 활짝 열린 도로가 되어 고민과 상처들이 쌓여있던 얼음과 눈처럼 녹아내리는 상상. 그 물줄기를 따라 나의 사유가 흘러넘치고 나는 다시 흙을 털고 일어나 이 지구, 나의 삶, 나의 하루를 오르는 첫발을 떼는 상상을 하게 된다.
새벽 4시 30분.. 어스름한 창밖으로 떠오를 태양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나의 내부와 외부의 청소욕을 북돋아주는 소로의 글들이 이어진다.
"집을 아름다운 물건들로 장식하려면 우선 벽을 깨끗이 치워야 한다. (...) 아름다움에 대한 안목은(...) 야외의 자연 속에서 가장 잘 개발되는 법이다." (52면)
1650년대 뉴네덜란드에서 마을에 정착한 사람들이 농사를 지었는데 첫해의 수확이 너무 적은 탓에 긴 계절을 견디기 위한 방편으로 빵을 아주 얇게 썰어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에 빗대어 소로는 말한다.
"오늘날에는 그 시급한 욕구가 충족되고 있는가? 나도 호화로운 집을 하나 마련해볼까 싶다가도 이내 그런 생각을 버리게 된다. 그 이유는 이 나라 풍토가 아직은 사람을 키우는 데 적합하지 않고, 조상들이 밀가루 빵을 얇게 썰었던 것 이상으로 우리는 정신적 빵을 얇게 썰어야 할 처지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략) 마치 조개의 내부처럼 삶과 직접 맞닿아 잇는 부분부터 아름답게 장식하자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중략) 문명인이란 좀 더 경험 많고 좀 더 현명해진 야만인일 뿐이다." (53면, 54면)
지금의 우리도 170여 년의 그때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좀 더 현명해진 야만인인 우리들이 추구하는 삶은 무엇인가? 물질에 대한 욕심, 과시, 집착, 성공과 돈이 바로 행복이라는 공식. 그 공식을 풀기 위해 자신의 본질을 잊고, 찾지 않는 사람들.
나 역시 그런 사람이라는 게 슬프다.
정신에 쌓아둔 지혜와 소양이 턱없이 적으니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 최소한의 빵으로 연명해 왔던 시절.
물질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아니 끌려가는 삶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나에게 이 문장은 말하고 있다.
너의 정신에 먹이를 줘라.
너의 사유를 발효하라.
그래서
너의 내면을 살찌워라.
소로의 말처럼 "마치 조개의 내부처럼 삶과 직접 맞닿아있는 부분"부터 깨끗하고 정갈하게 가다듬고 그 부분에 내면의 아름다움을 채워가다 보면 나의 상처들도 조개 안의 모래알이 진주가 되듯 반짝이는 보석이 되어 내 삶을 조금 더 빛날 수 있을 것 같다.
미학-철학 교수이자 작가였던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의 <아미엘 인생일기-인생에 대하여> 부분을 이어서 읽는다.
1852년 4월 26일의 일기. 아미엘은 사무치도록 공허함과 미래. 고독. 의무 등이 서서히 조여들면 자신을 덮친다고 말한다. 그러할 때는 자기 "자신을 다잡으며 다시 검토하고 정리하고 집중 한 뒤" (66면) 자신 속으로 몰아넣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루하루의 생활과 사소한 일들이 가져오는 산만함과 방심을 막기 위해서 필요하다"며. 그런 생각들을 다른 노트에 적었다고 한다.
보통은 이런 상념에 사로잡히면 그 안에 매몰되어 헤어 나오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아미엘은 그 조차 글을 쓰며 자신에게 집중해 검토하고 정리하는 삶을 살았다니 대단하다.
아미엘은 "내 마음에 속할 수 있는 교회는 언제쯤 건설될 수 있을까? (...) 나에게는 고독하지 않는 그리스도교가 필요하다. 또 더욱 실천적인 것이 필요하다"라고 한다.
나도 한때는 교회에 잠시 다녔다. 하지만 내가 속했던 교회들에서 많은 실망을 겪은 후로 종교생활을 따로 하고 있진 않다. 아미엘 말처럼 "내 마음이 속할 수 있는 교회"를 아직 못 찾았다.
성경을 읽고, 찬양을 하고, 설교를 듣고, 나와 가족, 세상을 위해 향하는 기도. 영적인 치유.... 나는 그것을 바랐는데 그 외에 종교생활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속물적, 세속적 다툼과 인간관계, 어긋난 윤리 등이 나를 교회에서 등 돌리게 했다.
앞으로 내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저 어떤 형태, 어떤 형상으로든 "신"이라는 존재는 마음에서 지우지는 않았다.
"스스로 무리하지 말라. 네 마음의 떨림을 소중히 하라. 그것이 너의 생명, 너의 본성이다. 너보다 현명한 것이 그것을 만들어 준 것이다. 본능과 의지에 자신을 전부 맡기지는 말라. 하나는 인어, 또 하나는 폭군. 한때의 감각과 충동에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계획에 노예처럼 굴복하지 말라. 삶이 안팎으로 가져다주는 것, 생각지도 못한 것을 향해 팔을 뻗어라. 네 삶을 통일하고, 생각지 못했던 것도 네 계획의 선 안에 집어넣어라. 자연을 이지(理知)로 높이고, 이지가 자연이 되도록 하라. 이 조건으로 비로소 너의 발전은 조화를 이룰 것이고, 올림포스의 청랑함, 천국의 평화가 네 이마에서 빛날 것이다." (69면)
이 문장을 읽으면서 요즘 나에게 일어나는 변화, 성장, 꿈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막연히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이렇게 브런치에서 조금씩 연습장 삼아 글을 쓰다 보면 언젠가는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꿈을 꾸었다.
그저 뭔가 내 안에 일렁이는 것들을 쓰는 게 하나의 놀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글쓰기를 하나의 취미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내 안의 저 끝에 꿈틀대는 욕망은 그것이 아니었다. 내가 못할 것 같으니까 그저 막연한 꿈이라는 단어로 덮어 두었던 것의 실체를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너는 작가가 되고 싶다면서 왜 책을 안 읽어? 너는 글을 쓰고 싶다면서 왜 글을 매일 안 써? 너는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모임을 만들고 싶다면서 왜 못해? 그런 공간을 만들려면 너는 그 문화와, 공간에 어울릴만한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근데 왜 자꾸 먼 훗날로 그 꿈을 미뤄두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
그렇게 되려면 나는 나를 키워야지. 성장시켜야지. 언제까지 바닥에 등 붙이고 누워서 언젠가 저 먼 곳으로 달려가야지 하며 멍하니 있을 거야? 엎드려 배밀이라도 해야지! 두 팔로 몸을 지탱하고 발가락 끝을 땅에 대고 있는 힘껏 밀어내 조금이라도 지금 이곳을 벗어나야지! 그래야 잡고. 서고, 걷고, 뛰지!
아이넷 육아, 살림, 시부모님 돌봄, 아르바이트로 녹초가 되었으니 그걸로 너는 할 만큼 했다고 너 스스로를 자위하며 살지 마.
어른이라면 누구나 응당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을 하면서 사는 게 당연해.
그러니 그 속에서도 너를 키우는 걸 망설이지 마.
너를 키울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나를 가장 궁금해하는 사람도 나.
나를 가장 걱정하는 사람도 나.
나를 가장 격려해 줄 수 있는 사람도 나.
그리고 누구보다
나를 성장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도 나.
그걸 잊지 말자!
<엄마의 유산> 글쓰기 전체모임을 두 시간 넘게 하고 왔더니 내 의지가 더 활활 타오르면서 글 속의 단어들이 화르르~~~ 타오르고 있다.
은유 <해방의 밤- 약자지만 약한 사람은 아닌>은 어제에 이어지는 성폭력에 관한 이야기다.
은유 작가와 쉼터에서 글쓰기로 만났다는 "최예원".
그녀는 성폭력 피해자로 자신과 같은 피해를 입은 열한 명의 여성들과 <죽고 싶지만 살고 싶어서>라는 책을 썼다는 소식을 전한다.
통계적으로 우리나라 친족 성폭력은 매년 15퍼센트를 차지하고 아동-청소년의 피해자는 무려 30퍼센트다 된다고 하니 기함할 노릇이다. 하지만 정작 피해자들은 가족들에게 조차, 심지어 자기 엄마에게 조차 이해받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잘못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에 대한 사회적인 태도는 잔혹할 만큼 불친절하다. 그녀가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1인 시위에 참여하는 것만 봐도.
한 생존자는 살아있는 동안에 한 번쯤은 마음 편히 자보고 싶다고 말한다. 피해자 최예원 작가도 그 불면의 시간을 견뎌냈고 모소리가 나달 해진 두 권의 노트가 그 시간을 대변한다.
은유 작가는 말한다.
"불면이 글을 낳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면 글이 또 숙면을 준다고 믿어요. 웅얼거리는 복잡한 생각들과 덩어리 감정들이 언어로 정돈되면 문제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그러면 우리는 숨을 고를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저마다의 이유로 불면의 시간을 보낸다.
나 역시 그런 시간이 있었다. 20여 년간 우울증 약과 수면제로 밤을 버텨야 했던 나날.
이제는 그 불면의 시간을 새벽독서와 글쓰기로인해 숙면의 시간으로 바꾸고 있다.
요즘 이렇게 브런치에 여러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한 나를 보며 누군가 말했다.
"그동안 이렇게 쓰고 싶은 게 많았는데 그거 못하고 살아서 병났던 거 아니에요?"
그만큼 나는 브런치스토리에 2024년 10월부터 글을 쓰면서 많은 변화를 맞았다.
그저 쓰고 싶은 사람에서 뭐라도 쓰는 사람으로.
그저 눈뜨니까 살아가던 사람에서
더 잘 살아보고 싶어서 스스로 눈떠 새벽을 맞는 사람으로.
새벽독서로 나의 의식을 깨우고, 머리를 채우고,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는다.
그리고 그 하나의 증거로 나는 이렇게 매일 쓴다.
이것은 새벽독서로 나를 살리는 간증이고 간절한 기도다.
참고> <매일 읽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 니케북스 022 1쇄
참고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열림원 2022. 10쇄
참고> <아미엘 인생일기> 동서문화사 2006. 1쇄
참고> 은유 <해방의 밤> 창비. 2024 2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