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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독 20일차] 4평의 자유, 관조의 비늘빛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아미엘 인생일기>, 은유 <해방의 밤>

by 윤서린

토요일 오후는 아래층에 사시는 시어머님, 시아버님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남편이 퇴근해서 오기 전까지 저녁식사를 챙겨드리고 잠시 말벗도 되었다가 어머님 환자침대 옆에 이부자리를 펴고 나만의 공간을 만든다.


어머님은 5년 전 자전거 사고로 뇌를 크게 다치셔서 한쪽이 편마비다. 혼자 거동이 어렵다. 다행이라면 걸음보행기를 짚고 몇 발자국 앞 화장실로 이동할 정도는 되었다는 것. 하지만 직장암 수술과 편마비로 인해 화장실에 도착하기 전 일이 해결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기에 기저귀를 착용하신다.


걸음이 위태롭고 혼자 허리를 온전히 편채 중심을 잡고 서기가 어려워서 넘어질까 항상 보호자가 옆에 있어야 한다. 2년 전에도 선풍기를 끈다고 허리를 구부렸다가 중심을 못 잡고 넘어지는 바람에 갈비뼈가 골절되어 한 달을 침대에 누워만 계셔야 했다. 주중에는 간병인 여사님이 계시고 주말은 나와 남편이 시어머님 곁에 있는다.


남편이 퇴근 후 날 깨우러 오지 않았다. 새벽 2시 반쯤 추워서 깼다. 이불도 없이 어머님 침대 옆 바닥에서 웅크리고 깜빡 잠이든 것이다. 이럴 땐 남편이 좀 얄밉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전, 1년 반전만 해도 온전히 내가 주말 내내 어머님과 함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도 평일에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니 일요일 하루는 내 시간으로 쓰고 싶다고 당당히 말하게 되었다.


글쓰기 줌회의와 새벽독서를 시작하면서 일요일 아침밥도 차리러 내려가지 않는다. 남편에게 시부모님과 아침상을 차려서 먹으라 당부하고 일요일은 온전히 어머님 옆에 당신이 있으라고 말한다.

나는 "미움받을 용기"를 냈기 때문이다.

착한 며느리라는 이름표를 떼지 못하며 자신을 병들게 하는 이들이여, 용기를 내자.

시작이 어렵지 거절도 연습하면 된다.


남편이 새벽 4시에 내려왔다. 새벽독서할 시간이라며 노트북 가방 챙겨서 날 배웅해 준다.

어른들이 말하는 싸가지 없어진(?) 며느리는 시부모님 아침상도 안 차리고 신이 나서 책상에 앉는다.


<매일 읽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1856년 3/23일 일기를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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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숲에 스라소니, 오소리, 늑대, 곰, 사슴 같이 고귀한 동물이 멸종했다는 사실에 소로는 안타까운 마음을 전한다.


"1년이라고 불리는 특별하고도 자연적인 순환 현상을 떠올리면서 이제는 안타깝게도 나의 자연 속 삶이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새기게 된다. 여러 악기의 자리가 비어 있는 채로 연주되는 [하나의] 협주곡을 듣고 있다."


나는 그의 <월든>이라는 책 속 호숫가옆 오두막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보곤 한다. 자연 속에 둘러싸여 평온하고 고요한 공간. 그런데 170여 년 전에도 자연이 훼손되고 야생동물의 멸종을 걱정하고 있는 소로의 일기를 읽다 보니 우리 인류는 아주 긴 시간 동안 자연을 계속 망치고 있었구나 싶다. 그에 나도 일조하는 삶이니 마음이 안 좋다.


지속가능한 삶, 그것을 위해 우리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분리수거할 때마다 복잡하다고 투덜거리던 나 자신. 이러다 정말 자연이라는 악기가 비어있는 무음의 협주곡을 듣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니.

반성 좀 하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 보자.


<월든>

열림원에서 출판한 <월든>은 책 안에 월든 호숫가와 근처 마을 풍경 사진이 수록되어 있어서 책을 읽으면서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의풍경을 같이 볼 수 있다. 그 시절을 상상하는데 도움이 많이 된다.


오늘은 드디어 소로의 집짓기 이야기가 나온다.

신문에 싼 버터 바른 빵을 도시락 싸들고 소나무를 베어 기둥을 세우고, 감자를 저장할 2미터 깊이의 작은 지하저장고를 파고 낡은 판잣집을 사서 분해해 집을 손수 짓는 그.


"화가라면 잘 알고 있겠지만, 이 나라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택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의 꿈 빔 없고 소박한 통나무집과 우두막집이다. 이런 집들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특이한 외관이 아니라 그 집을 껍데기로 삼아 살아가는 거주자의 삶이다.". (63면)


이 문장처럼 우리는 집의 크기나 외형보다 그 안에 어떤 사람의 삶이 배어있는가에 대한 것에 의미를 알아갈 필요가 있다. 요즘처럼 집이 재테크의 수단이 되고 누구나 역세권 고층 아파트에 사는 게 꿈이 되어버린 시점에 우리는 어떤 삶의 지향점을 갖고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봐야 한다. 나조차도 집에 얽매여 집을 위해 일해야 하는 삶으로 살아가기에 그 고민은 더 깊어진다.


그는 월든 호숫가 근처에 손수 4평 정도의 집을 짓고 2년 2개월의 시간을 살았다.

지금의 금리로 환산해 보면 14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들었는데 하버드 대학 기숙생은 1년에 이 보다 더 많은 돈을 내야 했다고 한다.


소로는 학생들에게 육체노동을 경험해봐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회가 이렇게 돈이 드는 놀이 비용을 내준다고 해서 학생들이 그냥 놀면서 인생을 보내거나 공부만 하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살아보라'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당장 인생을 실험해 보는 것보다 삶을 사는 법을 더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중략) 교실에서는 모든 것을 교육받고 훈련할 수 있지만, 정작 삶의 기술은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업화가 잘 이루어진 현재를 살아간다. 작가의 말처럼 누구를 위한 분업화일까? 우리는 분업화로 생산성과 호율성을 올려 더 많이 더 빨리 물건을 만들고 건물을 올린다. 그 안에 우리의 자립심과 성취, 평온, 사유가 쌓일 틈은 없다.


인생 중반을 넘어가는 나이가 되니 이제 높은 건물 위에서 땅과 멀어진 채로 살아가는 삶이 질린다.

어려서부터 시골, 전원생활에 대한 꿈이 있었다. 남편 따라 시부모님과 함께 3000평 넘는 채소농장을 15년 넘게 운영하며 흙을 만지고 살면서도 나는 늘 전원생활을 꿈꿨다. 지금은 시어머님이 아파서 운영을 멈추고 남편과 나는 각자의 일을 하며 산다.


나는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렇게 공장식으로 채소를 키워서 일에 파묻혀 사는 고단한 노동이 아닌, 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금으로 쌓아 올린 집이 아닌, 그저 창이 넓어 마당의 나무와 하늘이 보이는 작은 시골집에서 먹을 만큼의 텃밭을 땀 흘리며 가꾸고 일구며 차분하고 소박하게 살다 죽고 싶었다.


10년 후면 어쩌면 나도 그런 삶이 가능할지 모른다. 12살 막내가 성인이 되면 실행해 볼 계획이다.

남편 고향에 조립식으로 된 오래된 집이 하나 있다. 시할머님이 농사짓고 살던 곳이다. 나는 현실이 너무 고단할 때면 그곳을 떠올린다. 그리고 상상한다.


까치발 들면 멀리 보이는 소나무들과 흙냄새 묻은 바람과 이름 모를 들꽃과 노곤 한 햇빛. 그 안에서 느긋하게 뒹굴거리며 책 읽다 졸다 글 쓰다 졸다 물감 묻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비 오는 날 훌쩍 맨발로 마당을 산책하는... 그런 내가 그곳에 살고 있다.

얼른 그런 나를 만나보고 싶다.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의 <아미엘 인생일기>를 짧게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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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나를 사로잡았던 멋진 공상들이 다시 나를 찾아올 수는 없을까? (중략) 세계를 가슴에 안고, 손으로 별을 만지며 무한을 내 것으로 하는 장대하고 영원한 우주 개벽론적 공상, 거룩한 순간, 사상이 세계를 가로지르며 커다란 수수께끼를 꿰뚫고, 대양의 낮동안 숨결처럼 크고 조용하고 깊게, 창공처럼 거리낄 것 없이 유쾌하게 호흡하는 환희의 순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관조의 비늘빛이 발하게 하고, 그 마음에는 천재의 조용한 도취 또는 권위를 주입하는 여신 우라니아가 찾아오며, 사람이 스스로 우주처럼 위대하고 신처럼 평정하다고 느끼는, 저항할 수 없는 직관의 순간이 다시 올 수는 없는 것일까?". (70면)


아미엘은 시집을 낸 철학교수여서 그런지 문장이 형이상학적이고 시적이다.

이 문장은 밑줄을 긋고 입술로 소리 내어 읽어본다.


장대하고 영원한 우주가 처음 생겨난 순간과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되는 우주를 상상하며 아미엘이 상상한 우주 속을 나도 함께 유영해 본다.


오늘 건율원 인문학 강의가 아침 7시-8시까지 유튜브 라이브로 있었다.

그때 "나"와 "우주"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었다.


"나는 거대한 세계이자 하나의 우주"라는 지담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이 말은 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내가 하나의 "우주"라니

우리 모두가 "우주"라니


이 말이주는 힘은 강하다.


나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 얼마든지 새롭게 창조되는 사람!

가슴 깊이 말을 새긴다.


아미엘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관조의 비늘빛"이 발하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사물이나 진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깊이 이해하려는 태도, 관조(觀照)와 빛비늘, 마치 빛이 비늘처럼 반짝이는 것처럼 사유와 삶의 지혜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깨닫길 바라는 마음이 녹아있다.


"사람이 스스로 우주처럼 위대하고 신처럼 평정하다고 느끼는, 저항할 수 없는 직관의 순간이 다시 올 수는 없는 것일까?" (70면)


어쩌면 나는 오늘 인문학 강의 속 "우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미엘이 말한 "저항할 수 없는 직관의 순간"을 살짝 맞이한 걸지도 모른다.


내가 "우주"이므로, 나는 끊임없이 "창조"되므로 그 안에서 가장 나다운 것에 집중해 살아야겠다.

떳떳한 내가 나다운 글로 성장하길 바라면서.


은유 <해방의 밤- 세상의 무수한 고통>을 읽는다.

오늘 역시 무거운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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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항에서 일하다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사망한 스물세 살 청년 이선호 씨의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사고 뉴스를 종종 접한다. 그런 뉴스를 보면서도 우리와 크게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은유 작가는 "내 발밑의 물이 연결되어 있듯이" 이런 일련의 일들은 우리와 맞닿아있다고 말한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이라는 책을 읽고 "우리 아이는 특성화고를 보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어떤 학부모의 소감은 나를 한숨짓게 한다.


그 학부모의 마음도 이해는 된다. 내 자식은 그렇게 위험하고 안전하지 못한 세상에 내보내고 싶지 않다는 두려운 마음에 들었을 생각이었을 테니까. 나 역시 그런 상황에 아이를 내보낼 수 있나? 생각해 보면 쉽게 답을 못하겠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지 말아야 내 아이도 지킬 수 있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나 폭력에 무감각한 사람이 되어가는 우리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세상이 점점 무한 경쟁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그 안의 우리는 늘 긴장된 상태로, 늘 바쁘고 화가 난 상태, 다른 사람의 힘듦이나 고통은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 점점 초이기주의 시대가 되어간다.


그 안에서 나는 불합리한 것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 약자를 변호할 수 있는 사람,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인지 묻는다. 부끄럽게도 아직 아니다. 나는 겁쟁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나를 담대하게 키우고 좀 더 다정한 마음으로 이웃과 가족, 나를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작은 변화가 나를, 우리를, 세상을 조금 더 나아지게 만들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참고> <매일 읽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 니케북스. 2022 1쇄

참고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열림원 2022. 10쇄

참고> <아미엘 인생일기> 동서문화사 2006. 1쇄

참고> 은유 <해방의 밤> 창비. 2024 2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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