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엘 일기>,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은유 <해방의 밤>
어제 서울에 글쓰기 모임이 있어서 나갔더니 우리 집에서 불과 20분 떨어진 그곳에는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산수유, 히어리, 개나리, 영춘화, 미선나무의 꽃이 앞다투어 반개(半開), 만개(滿開) 중이었다.
봄이 20분만 더 달려오면 우리 동네에도 꽃이 필 것이다.
오늘은 <아미엘 인생일기> 먼저 읽는다.
1852년 4월 29일 아미엘은 집에 피어나는 라일과 조팝나무를 보며 감탄한다.
"아침의 사상처럼 다소곳하게 피어" "꿀벌이 이슬처럼 앉아 있는 모습" 그는 아이들에게도 풀꽃, 관목, 풍뎅이, 달팽이를 살펴보게 한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관찰, 감탄, 친절"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70, 71면)
아미엘은 "유년시절에 나누는 최초의 대화가 얼마나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던가? 이 사명의 신성함을 절실하게 느끼며, (중략) 결실을 맺는말을 뿌리는 아버지는 사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중략) 흙에 떨어지든 마음에 떨어지든 씨앗은 모두 신비로운 존재이다. 인간은 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71, 72면)
우리나라 속담에도 "말이 씨가 된다"라는 말이 있다.
아미엘의 말처럼 "언어가 계시이며 파종이라는 것"(72면)을 잊으면 안 된다.
아미엘의 “인간은 심는것”이라는 말처럼 나의 말씨앗이 한사람을 싹틔우고 자라나게 한다면 더 신중하고 다정하게 말해야겠다.
말이 우리를 만든다. 우리의 영혼이 듣고 있다.
서로에게 좋은 말, 긍정의 말, 감사의 말을 들려주자.
가까운 가족, 지인, 벗, 그리고 스치듯 만나는 사람들에게 조차.
1852년과 2025년의 바쁨, 많은 일은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사람들이 모두 "루틴"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다그치며 살아간다는 걸 아미엘이 보면 외치겠지.
여보시게들, 그리 바쁘게 사는 게 뭐가 중요한가,
"한가로이 거니는 안식이 나중에 노동의 긴장만큼이나 중요한 결실을 맺게 될지"(71면) 누가 알겠는가.
"한가로운 산책은 기분 좋은 것 외에 우선 유익하다. 육체와 정신에 탄력을 회복시켜 주는 건강한 목욕이고, 자유의 징표와 축제이며, 발랄한 향연, 들판을 누비며 꿀을 따는 나비의 향연이다. 정신이 곧 나비이다."
요즘 걸을 일이 없었다. 가까운 거리도 차로 이동하니 큰 마음먹지 않으면 걸을 일이 없다.
작년 봄에는 20년 만의 산책으로 그래도 열심히 걸었던 것 같은데, 여름은 더워서, 가을은 바빠서, 겨울은 추워서 걷질 않았다.
그래서인지 감성이 메마른 것 같기도 하고.
작년 봄의 하천을 걸으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자연의 경의를 맛보았던가.
겨울눈을 뚫고 나오는 새싹들이, 쨍한 공기 속에 활짝 피어나던 꽃들이, 나를 허리 숙이게 했던 이름 모를 들꽃들이, 고고한 백로의 흰 날갯짓이... 나를 따라 흐르는 구름과 햇빛으로 마음 샤워를 했던 많은 순간들이 떠오른다.
오늘은 기필코 일 끝나고 산책을 해야지 싶다.
눈보다 발로 먼저 봄을 만나고 싶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경제생활> 부분을 이어서 읽는다.
소로는 기차여행과 도보여행을 비교해 자신이 생각하는 여행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에게 여행을 좋아하면서 왜 저축하지 않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소로는 "나는 보기보다 똑똑한 편이어서, 도보여행이 가장 빠른 여행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70면)
기차보다 도보여행이 빠르다는 게 무슨 의미냐고?
이건 단순히 짧은 거리의 여행을 비교한 거라 모순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요지는 "거리가"가 아님으로 이점을 기억하고 이 문장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걸어서 가는 동안 당신은 우선 차비를 벌어야 할 테니 내일쯤에나 도착할 것이다. (중략) 기차를 타면 지구 끝까지 갈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항상 당신보다 앞서 갈 것이다. 가는 동안 곳곳의 풍경을 구경하고, 그런 경험을 쌓다 보면 나는 당신과 친분을 끊어야 할지도 모른다." (70면)
그렇다. 소로는 쉽고 편한 여행을 위해 고된 노동으로 그 기차표를 살 돈을 벌기보다 지금 당장 떠날 수 있는 여행을 하라고 말한다. 그것을 지금의 우리에게 대입해 보면 언젠가 돈 모아서 해외여행을 가겠다는 꿈도 좋지만 그걸 위해 지금 자기 주변에서 언제든 할 수 있는 소박한 여행을 놓치고 살지 말라는 말인 것이다.
"인생의 가치가 최저로 하락한 노년기에 확실치 않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 인생의 황금기를 돈벌이로 소진하는 사람을 보면, 훗날 고국에 돌아와 시인의 삶을 살겠다며 인도로 돈을 벌러 떠났던 어느 영국인이 생각난다. 그는 인도로 가는 대신 당장 다락방에 올라가 시부터 썼어야 했다.". (71면)
다가올 먼 미래의 무엇인가 이루기 위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미루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고 소로는 말한다.
나 또한 먼발치의 미래에 내가 되어있고 싶은 모습을 막연히 상상만 하고 있었다.
그저 아이들 넷 다 키우고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그때 내가 원하는 걸 해보고 싶다고.
하지만 그 미래를 위해 나는 움직이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듯 그렇게 지내며 살아왔다.
살림, 육아, 일... 거기에 내 꿈을 위해 투자한 시간은 없었다.
에세이, 그림책 작가가 되려면 매일 쓰고 그려야 한다.
단편소설을 쓰려면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스토리를 짜야한다.
시를 쓰려면 자연 속에서 걷고 느끼고 사색해야 한다.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 단어 하나를 찾아내야 한다.
소로의 말처럼 미래의 확실치 않은 자유를 위해 현재의 나를 희생하지 말아야겠다.
뭔가 하고 싶으면 "당장"해 봐야겠다.
지금이 바로 내 "인생의 황금기"니까.
3년 후, 5년 후에 시작하는 것과 지금 시작하는 것은 분명 다를 것이다.
나는 지금의 나를 믿어줄 것이고 응원해 줄 것이다.
은유 <해방의 밤-연민과 배려사이>를 읽는다.
현장실습을 하러 갔다가 사고를 당한 고 김동준, 이민호 군의 이야기를 책으로 쓴 은유 작가는 동준이 어머니에게 자신의 아들 졸업식 사진과 함께 연락을 한다. 서로 눈치 보지 말고 동준이 얘기를 편안하게 하고 싶다는 동준 어머니의 바람이 생각나서였다.
어쩔 수 없이 동준이 생각이 났고, "동준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안전한 세상을 같이 만들어보자"(166면)는 마음을 담아 문자를 보냈는데 곧 답이 왔다.
"잘하셨어요. 일상을 나누지 못하면 친구 하기 어렵잖아요." (166면)
자식의 죽음 앞에서 다른 이의 행복한 일상을 보며 느낄 괴로움은 얼마나 클까. 상상조차 어렵다.
은유 작가도 그런 마음의 미안함이 문자를 보내고도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을 나누지 못하면 친구 하기 어렵다'는 동준 어머니의 말은 복잡한 은유작가의 마음을 명쾌하게 정리해줬다고 한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감정에 최대한 충실하자, 산 자식 얘기하듯 죽은 자식 얘기도 하고 싶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생활에선 감당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내 미안함이 미안했습니다. 어설픈 연민을 경계해도 세심한 배려엔 도달하지 못한 채 이렇게 헤맵니다" (166면)
누군가를 위로할 때 우리는 어떤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헤맬 때가 많다.
나의 말이 오히려 의도와 달리 상처에 바르는 소독약처럼 쓰리게 느껴질까 봐 겁이 난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럴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손을 잡아준다.
며칠 후, 세월호 유가족 중에 남은 가족을 돌보기 위해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기도 했던 어떤 이의 죽음을 바라보며 작가는 말한다.
나의 주변에도 분명 있을 괜찮아 보이는 사람, 나는 오늘 그 사람을 위해 모처럼 안부전화를 해야겠다.
"일상을 나누지 못하면 친구 하기 어렵다"는 동준 어머니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참고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열림원 2022. 10쇄
참고> <아미엘 인생일기> 동서문화사 2006. 1쇄
참고> 은유 <해방의 밤> 창비. 2024 2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