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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독 23일차] 자선의 본모습, 엄마의 언어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은유 <쓰기의 말들>

by 윤서린

오늘은 나에 맞는 독서처방으로 고른 읽어야 할 책 <월든>과 읽고 싶은 책 은유 <쓰기의 말들>을 읽어본다.


어제 낮에 두 시간 동안 중학교 동창인 나의 유일한 친구와 1:1 영상통화 독서모임이 있었다.

<월든>의 경제생활 부분을 각자 읽고 와서 그 이야기를 같이 나누는 시간이었다.

말미에 나는 은유 작가의 <쓰기의 말들>이라는 책을 친구에게 소개했다.


그 친구가 자녀의 학업문제나 부부간의 대화, 부모님에 대한 걱정 같은 것으로 가끔씩 버거워할 때 나는 글을 써보라고 권했었다. 불과 나도 글을 쓰기 시작한 게 6개월 전이지만 권유는 4개월째 계속했다.

내가 글을 써보니 글의 치유의 힘을 알게 되었고 나는 이 환희를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젯밤 저녁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돌아와 보니 11시 26분, 늦은 시간에 문자가 와있었다. 아마 내가 11:30분에 일이 끝나니 참다 참다 그 시간에 보낸 모양이었다.


그녀는 꽤 흥분해서 (본인 표현대로) 도서관에서 빌린 은유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과 <쓰기의 말들>에 문장들을 여러 장 찍어서 나에게 보냈다.


"당장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당장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문구들을 만났어~. 네 덕분에~~ 더불어 은유 작가 글들 모조리 읽을 기세 ^^"


내가 글 쓰자고 할 때는 꼼짝도 안 하더니,

"역시 내 말보다 더 강력한 문장들이 너를 이끄는구나!!!! 최고다 친구야!!!!"

나는 기쁜 마음으로 답장을 보낸 후 잠이 들었고 오늘 새벽에 다시 그 문자를 보며 미소 짓는다.


뒷부분에 그녀가 보낸 문장을 나도 내 책에서 찾아 읽어봐야겠다.


어제 중학교 동창인 친구와 같이 읽은 <월든-경제생활>의 뒷부분을 다시 혼자 읽는다.

좀 더 생각이 필요한 글이어서 꼭꼭 씹어 읽는다.


소로는 "자선"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선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같은 인간에 대한 사랑은 아니다." (97면)


자선이 "그들이 구제하려고 애쓰는 가난을 오히려 조장하고 있다", (98면)


"자선은 인류가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미덕이다. 아니, 그것은 너무 과대평가되고 있다.". (99면)라고 말한다.


단순한 나의 생각으로는 "자선"이라는 것은 너무도 존경받을 만하고 위대해 보이는 일인데 왜 소로는 그것을 경계하라고 말할까?


"가난한 사람을 도와줄 때는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도움을 주도록 하라. 돈을 줄 때는 그냥 돈만 무작정 주지 말고, 돈과 함께 당신의 힘도 쓰도록 하라. 우리는 이따금 엉뚱한 실수를 저지른다. (중략) 그에게 돈을 주면, 그는 아마 그 돈으로 더 많은 누더기를 사 입을지도 모른다.". (98면)


속담 중에 배고픈 자에게 물고기를 주지 말고 낚시하는 법을 가르치라는 말이 있다.

소로는 선의에서 이루어지는 돈으로 쉽게 하는 "자선"이라는 행동이 오히려 그들을 더 해롭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단순히 배고픔과 추위를 해결해 준다고 해서 그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자선"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한 게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

"그의 선량함은 불완전하고 일시적인 행위가 아니라 늘 차고 넘치는 것이어야 한다. 선량하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를 필요도 없고, 자신이 희생을 치른다는 사실도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수많은 죄를 감추어주는 자선의 본모습이다." (100면)


"개혁가를 그렇게 슬프게 하는 것은 고통받도 있는 같은 인간에 대한 동정심이 아니라 그 자신의 개인적인 고민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고민이 말끔히 해결되고 그에게 봄이 오면, 그리고 그의 침대 위로 아침 해가 떠오르면, 그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너그러운 동료 개혁가들을 저버릴 것이다. (중략) 당신이 어쩌다 자선활동에 발을 들여놓는다 해도, "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태복음 6:3)". 그 일은 굳이 알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 뒤에는 구두끈을 묶어라. 그리고 천천히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떠나라."


"가난한 사람들의 관리자로 머물지 말고, 세상의 훌륭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자."(102면)


어쩌면 우리가 베푸는 선행이나 자선은 나의 죄책감이나 허영심, 무력감을 달래는 수단으로 잘못 사용될 수 있다.


소로의 말처럼 자선가나 개혁가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고민"으로 그 일(선행, 자선)에 열중하고 있다가 자신의 고민이 사라지면 그 일을 그만두는 것을 우려했다. 그것은 진정한 선행이 아닐 것이다. 또한 자신의 자선이나 선행을 앞으로 내세워 자랑거리로 삼지 않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관리자"로 머물지 말고 "천천히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떠나 "세상의 훌륭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자"라고 말한다.


나는 10년 동안 후원을 한 과테말라의 한 소년이 있다.

내가 엄청난 우울증으로 허덕일 때 후원을 시작한 아이였다. 셋째 아들과 같은 나이의 한 소년을 지정 후원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의 하나를 그 소년을 통해 붙들고 싶었던 마음이었던 것 같다.


'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우리 아이들은 물론 저 멀리 과테말라의 한 소년도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한다.'라는 나의 이런 생각은 삶에서 흔들리는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어줬다.


감사하게도 나는 10년간 후원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그 아이의 사진과 편지는 나에게 큰 힘을 줬다. 누군가에게 400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은 핸드백 하나도 살 수없는 작은 돈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10년을 따뜻한 마음으로 보낼 수 있는 돈이기도 하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 또한 소로가 말한 그들과 같이 우울증이 회복되어 가면서 나의 고민이 사라지니 "선행"이라는 행위를 이어나가지 못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그 친구가 성인이 되어 이제 더 이상 후원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이어서 바로 그의 동생을 지정후원하려 했으나 한 가정에서 여러 후원을 받을 수 없다는 기준에 의해 연결이 되지 않았다.


내가 진짜 선한 사람이고 선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다른 후원이 필요한 아동을 연결하려고 했겠지만 나는 쉽게 포기했다.

앞으로의 10년을 꾸준히 후원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네가 손에 가진 것이 많거든 대추야자처럼 아낌없이 베풀어라. 하지만 베풀 것이 없거든 삼나무처럼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라." (103면)


나는 대추야자가 아니니 삼나무처럼 살아야 하는 걸까?

"세상의 훌륭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자"라는 소로의 말처럼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일까?


너무 어려운 문제라 머리도 마음도 어깨도 무겁다.


나는 글쓰기에 관심이 생기면서부터 서점에서 계속 글쓰기 관련 책을 모으고 있다.

모. 으. 고. 있다.

읽. 고. 가 아니고.


그렇게 모으고 모셔둔 책 중에 하나가 은유 작가의 <쓰기의 말들>이다.


은유 작가의 <해방의 밤>을 읽다가 연속으로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가 나오니 나는 마음이 물먹은 솜이불처럼 묵직해져서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라는 햇볕에 마음을 내다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유 작가의 글로 무거워진 마음을, 은유 작가의 글로 다시 덜어내려는 것이다.



친구가 "당장이라도 글을 쓸 용기가 생길 것 같다"며 나에게 흥분하여 보낸 문자 속에 등장하는 문구가 나온다.


"아주 서서히 글을 쓰는 목소리를 찾아냈다. 지적이고 공정하며 이성적인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것이었다.". -트레이시 키더


아마 이 문장에 덧대어진 은유 작가의 말이 그 친구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어제 1:1 독서모임하면서 우리는 자녀들의 공부와 부모의 갈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었다.


나는 워낙 아이들 공부는 일찍이 내려놓아서 그걸로 아이들과 부딪히는 일은 거의 없다.


이미 첫째 딸아이가 중학교 때 마음을 비운 터였다. 그 수혜를 입은 둘째 딸, 셋째 아들, 늦둥이 막내아들은 부모의 "일류대학, 대기업, 공무원, 전문직"에 대한 기대에서 비롯된 큰 중압감을 느끼지 않고 지낸다.


나라고 왜 우리 아이들이 더 넓은 세상에서 더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총망 받는 인물로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나 역시 평범한 엄마이고 부모인데..


남들은 더 좋은 대학을 보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지만 나는 이런 나름의 허술한 교육관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


내가 마음의 병으로 생과 사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지낼 때, 신종플루로 아는 분의 손자가 세상을 떠났다. 나 역시 큰 애가 신종플루에 걸려서 고생하고 있던 터였다. 큰 애가 중학교 시절 같이 운동을 배우던 학교 선배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세월호 사고까지 지켜보면서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무서웠다.


사춘기가 시작된 아이는 이 세상 모든 학교는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학교 심리 상담에서 청소년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내가 일한다는 핑계로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때까지 학교와 학원으로 아이를 내몰아서 생긴 마음의 병 같았다.


그때 나는 좋은 대학을 강요하는 마음을 포기했다. 그저 몸, 마음 건강히 내 옆에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되었다 생각했다. 공부와 진로는 아이를 먼저 정신적으로 되살려 놓은 후 고민하기로 했다.


그 후에도 몇 년 사이 주변 지인들의 아이 두 명이 더 부모 곁을 떠났다.

그때인 것 같다.

아이의 진로에 대한 걱정보다는 상처받은 마음을 더 신경 써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친구는 "글을 쓰면서 작가님 삶에서 폐기된 언어는 무엇이고, 새롭게 태어난 언어는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은유 작가가 이렇게 답한 걸 읽고 팍!! 뇌리에 꽂힌 모양이다.


그 말은 "애가 공부 못하면 어떡하지"하는 말이 사라진 것 같다는 은유 작가의 말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글로 쓴 구체적 일상, 내밀한 고백, 치열한 물음을 읽고 말하고 곱씹으며 나도 모르게 불안증이 가셨다. 성적과 행복이 비례하지 않아서 안도한다는 게 아니라, 삶은 성적이나 취직 같은 한두 가지 변수로 좋아지거나 나빠질 만큼 단순하거나 만만하지 않다는 것, 부단한 사건의 이행 과정이지 고정된 문서의 취득 수집이 아니라는 거을 어렴풋이 느꼈다. (중략) 하루는 반성문 쓰고 다음 날 계획표 쓰는 게 인생이랬나. 서툴고 거칠더라도 내 느낌과 생각을 지속적으로 표현한다면 아이의 삶을 북돋우는 엄마의 언어가 만들어지겠지.". (37면)



큰 아이가 대학졸업 후 임용고시 준비를 미루고 있다.

4년 동안 공부해 온 것이 무용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닐까 고민 중인 것 같다.

아이는 혼자 5년 넘게 독학으로 일러스트를 그리는 취미를 갖고 있고 그걸로 자신의 용돈은 벌어서 쓴다.

그런데 밤을 새우며 재미있게 하면서도 한계에 부딪히는 자신을 보면 직업으로 전향할 만큼은 자신은 없다고 한다. 나는 아이를 다그치지 않고 기다린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은 잘 모르겠다.


그저 내가 무언으로 해주는 말은,


나는 너를 믿고 있어.

나는 너를 응원하고 있어.

그러니 지금 이 시절을 무용하다고 생각하지 마.

이것 또한 네가 걸어가야 할 길의 여정 중 하나이고

넌 지금도 충분히 스스로 잘하고 있어.


오늘은 부디 이 무언의 말을 입 밖으로 내놓고 싶다.

아이의 삶을 응원하는 엄마의 언어로.


너 정말 잘하고 있다고.


참고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열림원 2022. 10쇄

참고> 은유 <쓰기의 말들> 유유 2019. 12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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