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프레데릭 아미엘 <아미엘 인생일기>, 은유 <해방의 밤>
읽어야 할 책을 읽는다는 것은 같은 문장을 꾸벅꾸벅 졸면서도 읽을 각오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오늘의 내가 그렇다.
<아미엘 인생일기>를 빼먹고 다른 책을 읽으면 좀 수월할 텐데... 그래도 1040페이지 중에 74페이지나(?) 읽었으니 포기하긴 싫다.
40분째 3페이지만 노려 보고 있다.
이게 도통 뭐라는 소리인지... 분명 "일기"인데 왜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하시는지요. 아미엘 교수님
우선 나의 뇌를 정지시킨 "유물론"이라는 개념의 문제점에 대해 아미엘이 쓴 일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물론은 한 사람 또는 대중의 모든 폭정을 방조하는 학설이다. 정신적, 윤리적, 일반적인, 나아가서는 인간적인 인간을 특수화하고 억압하는 것, 완전한 사람들을 만들어내지 않고 사회라는 커다란 기계의 톱니바퀴를 만드는 것, 그것의 중심으로서 의식(양심)을 주지 않고 사회를 주는 것, 정신을 사물에 굴복시키는 것, 인간에게서 인격을 빼앗는 것, 이것이 현대를 지배하는 경향이다. (중략) 나라면 차라리 이렇게 말하겠다. 이것은 모든 사물과 관념을 생각할 때 눈에 들어오는 문자와 정신, 형식과 내용, 겉과 안, 현상과 실재의 대향이라고, 유물론은 모든 것을 둔감하게 만들어 화석화하고, 조잡하게 만들며 모든 진리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 (74면)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우선 "유물론"이라는 말의 정확한 뜻을 알아야겠기에 네이버 국어사전을 켠다.
"유물론(唯物論), 만물의 근원을 물질로 보고, 모든 정신적 현상도 물질의 작용이나 그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이론"
그렇다면 아미엘이 유물론에 반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반대어로 나온 "관념론(觀念論)"일까?
네이버 검색에서 다시 검색하기
"관념론(觀念論) 정신, 이성, 이념 따위를 본질적인 것으로 보고, 이것으로 물질적 현상을 밝히려는 이론.
아미엘이 '유물론은 모든 것을 둔감하게 만들어 화석화한다"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 내면의 가치를 유물론의 관점이 무감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유물론과 관념론을 비교할 때, "뇌가 있기 때문에 생각이 가능하다 vs 생각이 있기 때문에 뇌를 인식할 수 있다" 또는 쉽게 "사랑은 호르몬 작용일 뿐이다 vs 사랑이라는 감정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깊은 감정이다'이 두 가지 주장을 살펴보면 나 역시 후자, 관념론적인 입장이다.
이 세상을 유물론적인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너무 상막하다.
이어지는 아미엘의 글,
"우리나라의 교육이 끊임없이 맞서 싸워야 할 적은 위험에 처해 있는 둔중성이다. (중략) 정말로 위협받고 있는 것은 윤리적 사유, 의식(양심), 인간의 기품 자체, 정신의 존중이다. 정신과 그 이익, 권리와 품위를 옹호하는 것은 누구나 위험을 인정하는 가장 절박한 의무이다. 인간성을 옹호하는 것은 저술가, 목사, 교육자, 철학자가 해야 할 일이다. (중략) 인간을 비루하게 하고, 그 가치를 감소하고 속박하며, 그 본성을 해치는 것과 싸워라. 인간을 굳세고 튼튼하게 하고, 고귀하게 하고, 향상하는 것을 지켜라.". (75면)
- "둔중성" : 성질이 이나 동작이 둔하고 느리다 (네이버 국어사전)
나조차 바로 세우기 어려운 세상에서 나, 우리, 세상을 위해 싸우고 지키는 삶을 살아가라는 아미엘의 말이 공감되면서도 막상 행동으로 옮기기에 부족한 나를 느낀다.
그래도 이렇게 꾸역꾸역 씹어 넣은 단어와 문장이 내 정신의 뼈대를 조금은 자라게 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책을 덮는다.
<아미엘 인생일기>를 읽으며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든다.
오늘 이 문장을 만나려고 나는 은유 <해방의 밤>을 읽게 된 것 같다.
이것은 "운명"일까?
내 삶을 뒤흔드는 말.
이제 더 이상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줄 문장.
그 귀한 문장을 책 속에서 만났다.
은유작가는 알폰소 쿠이론 감독의 <로마>라는 영화를 같이 본 "너"에게 이 편지글을 쓴다.
여기서 그녀의 직업이나 특징이 따로 언급되지 않고 "너"라고 부르는 건 은유작가가 그녀를 타인의 시선에서 보호해 주는 방법인 것 같다.
영화 <로마>의 여주인공은 연애하다 임신했는데 그 사실을 안 남자가 그녀를 극장에 버려두고 떠난다. 홀로 만삭의 몸으로 매일매일의 노동을 묵묵히 하던 그녀는 영화 끝 무렵 "아기를 낳고 싶지 않았다" 목 놓아 운다.
같은 영화를 보고 은유 작가는 엄살 없이 살아내는 여자를 존경하며 지구촌 가부장제 시스템에 분개했고, "너"는 "어쩌면 나도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라고 말한다.
생후 100일 무렵 홀연히 떠난 그녀의 엄마, 아빠와 아빠의 부모에게 가족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는 그녀는 엄마의 냄새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그녀가 아이를 낳아 10년 넘게 엄마로 살아가면서 이제야 '떠난 엄마'를 바로 본다며 글을 썼는데 그 글이 나를 울렸다.
나도 "너"와 비슷한 상황인데 나는 왜 아직도 떠난 엄마에게 원망을 더 많이 갖고 살아가고 있을까?
나에게 40년 넘는 동안 생물학적 "엄마"라는 존재는,
첫사랑도 버리고 젖먹이인 나를 떼 놓고 떠난 모진 여자, 자기 팔자 고치자고 딸 버리고 떠난 여자, 성인 된 나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해서 우리 가족, 새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은 여자, 아빠 돌아가신 후 이제야 홀로 된 내 걱정한답시고 시골 어른들 통해서 내 소식 묻고 다니는 여자.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싫었던 "엄마"라는 사람.
"엄마"라는 이름으로도 부르고 싶지 않은 사람.
그나마 15여 년 전 시골 아랫집 할머니가 해주신 말, "네 엄마는 가기 싫어했어. 근데 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와서 억지로 데려간 거야...".
그 한마디로 나는 어린시절의 응어리를 서서히 아주 조금 녹일 수 있었다.
그전까지 내 주위 모든 사람들은 엄마를 모질고 못된 년이라고 했다. 딸 버리고 시집가서 팔자 고친 년이라고.
그래서 나도 그렇게 알고 살았다.
내가 결혼하고 아이넷을 키우며 모유수유할 때마다 아이를 안고 많이도 울었다. 이렇게 작고 가냘픈 아이였을 나를 두고 떠난 생물학적 "엄마"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젓무덤을 파고드는 아이들을 안고 있으면서 그 모습에서 나의 어린시절을 보았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 허공을 향해 입을 벌리고 엄마젖을 찾고 있었을 내가 미치도록 불쌍했다.
나는 분유도 없어서 할아버지 등에 업혀서 사촌네 작은엄마에게 빈 젖동냥을 다녀야했다. 모유대신 뿌연 미음을 먹고 컸다. 날 버린 그녀는 새로 시집가서 아이를 셋이나 낳고 품에 안아 젖을 먹여 애지중지하며 키웠을 생각을 하니 억울하고 괴로워 미칠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이해하지도 용서하지도 못했다.
그 시절 나는 나를 두고 떠난 엄마를 더 미워하게 됐다.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나를 떠났는지, 엄마의 인생은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 결심을 하고 떠났을 때 어땠을지... 그런 건 안중에 없었다.
나는 막장 드라마에서 나오는 친자식을 버린 엄마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날 버리고 떠난 그녀에게 주는 세상의 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은유 작가의 글 속의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건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엄마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은 것뿐이다. (...) 엄마는 나에게 역할이 아닌 주체로 살라고 최초로 보여준 사람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20대 후반의 엄마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엄마,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 (193면)
나는 세상에서 무조건적으로 사랑받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에게 버려졌다는 슬픔과 고통으로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살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이 세상에 혼자라고 생각했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엄마처럼 나를 두고 다 떠날 거라는 생각이 뿌리 깊어 두려움에 떨었다. 그 누구에게도 온전한 마음을 주지 못하고 외롭게 살았다.
사실 나는 그녀를 다 이해하지도 못했고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미워하는 마음은 조금씩 흐려지고 있다.
그녀가 아빠가 돌아가신 후 고향 지인들을 통해 내 소식을 묻고 만나고 싶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녀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내 옆에 7살부터 있어준 지금의 엄마에 대한 의리이고 앞으로 남은 내 인생에 더 큰 고통을 떠안지 않기 위한 방어이다.
나는 글을 쓴 그녀처럼 마음이 넓지 못하다.
그녀처럼 어린 자식을 버리고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은 엄마를 이해하거나 “엄마, 너 자유로움으로 가”라고 응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를 나의 엄마가 아닌 한 여성으로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은 조금 생겼다.
이제 그 오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보았다.
그저 일 년에 한 번씩 떼어보는 가족관계증명서에 쓰인 그녀의 이름을 보며 그녀의 삶이 계속되고 있음에 안도한다. 그저 안도하면 그걸로 되었다.
나는 서랍 깊숙이 그녀의 존재를 밀어 넣고 오늘을 산다.
네 아이의 엄마로, 지금 엄마의 첫째 딸로.
누군가를 조금은 이해해 보려는 마음으로.
은유 작가의 <해방의 밤>을 읽으면서
나는 변하고있다.
문장 하나에 하나에,
내 삶과 의식이
급격히 해체되고,
서서히 재조립되고,
온전히 해방되어가는 중이다.
참고> <아미엘 인생일기> 동서문화사 2006. 1쇄
참고> 은유 <해방의 밤> 창비. 2024 2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