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 은유 <쓰기의 말들>
잠이 어스름 깬다.
어쩌면 새벽에 요의를 느끼는 것이 나의 알람시계를 대신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알람이 울리려면 시간이 남았다. 눈을 떠서 시간을 굳이 확인하고 싶진 않다. 눈뜨면 일어나야 될 것 같으니까. 그렇게 알람이 울리기 기다리며 몇십 분을 더 뒤척인 것 같다. 결국 4시 10분에 눈이 떠진다.
평소보다 30분 빨리 세수를 하고 나오니 내 기척에 고양이 쿠쿠와 나나가 벌써 안방 문 앞에 대기 중이다.
정말 부지런한 녀석들. 참치트릿 간식을 먹기 위한 새벽형 고양이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요의와 경의. 좀 웃긴 조합이다.
친구와 함께 읽기로 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을 읽는다.
오늘 1:1 독서모임이 있기에 <경제생활> 편인 105 페이까지 읽는 게 오늘의 목표다. 현재까지는 91페이지 진행 중.
소로는 월든 호숫가에 4평 남짓 오두막 집을 짓고 농사로 강낭콩, 감자, 옥수수, 순무 등을 심어서 수확한다. 임시변통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첫해는 1 헥타를 (3천 평 정도)를 이듬해에는 10/1로 줄여서 300평대에 작물을 심어 경작해 자급자족하는 실험적 생활을 한다.
그가 이 실험을 통해 간소하게 자기가 기른 농작물을 먹고 사치스러운 기호품과 농작물을 바꾸려는 마음만 갖지 않는다면 약간의 땅만 경작해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다는 결론을 얻는다. 결론적으로는 25달러의 적자(약 120만 원)가 생겼고 그것은 자급자족 생활의 경제적 한계를 보여주는 수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처럼 그는 "반면에 나는 여가와 자립과 건강을 얻었고, 게대가 내가 원하는 날까지 살 수 있는 안락한 집을 얻었다"라고 말한다. (80면)
소로는 물건에 대한 집착을 경계한다.
한 번은 어떤 부인이 소로에게 카펫을 주겠다고 했는데 자신의 집에는 공간도, 카펫을 털 만한 시간도 없어서 사양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카펫을 털 시간에 문 앞 뗏장에 발을 문질러 흙을 털어내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다. 그러면서 그는 "악은 커지기 전에 싹부터 잘라버리는 게 상책이다"라고 말한다. (88면)
오늘은 이 말이 나를 혼낸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물건 속에 파묻혀 산다. 나 역시 상당한 맥시멀리스트여서 필요이상의 물건이 많다. 특히 누군가가 쓸만하다고 주면 선뜻 우리 집으로 가져온다.
공짜는 양잿물도 마신다고 하시 않았던가. 그러다 보니 집에 사람이 사는 게 아니라 물건이 주인이 된 집에 내가 얹혀사는 신세 같다.
한참 미니멀리스트에 꽂혀서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하고 관련 책도 읽고, 다큐멘터리도 봤는데 부러워만 했지 실천을 못했다. 우울감, 무력감에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지만 물건에 대한 미련도 많아서였다.
스트레스로 인해 충동적으로 사들인 물건은 그 행복감이 몇 시간, 며칠 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들을 껴안고 사느라 눈에 그 물건이 보일 때마다 내가 한심해지는 것이다.
소로의 말처럼 애초에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내 삶에 들이지 않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머클래스족 인디언의 풍습처럼 "버스크"- "첫 수확제" 같은 것을 벌여야 할 판이다.
그들처럼 묵은 것들을 모두 모아 무더기로 쌓아놓고 불태워버린 후 새롭게 정화하고 단장하여 새 삶을 살아가야는 게 아닐까. (어제도 읽지 않는 막내의 책들을 다락방으로 몰아 올렸는데 그 미련한 짓을 왜 했을까 싶다. 어제 이 문장을 읽었으면 나는 수십 권의 전집을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었을까? 아... 안다고 전부 바로 실천할 수 있다면 이런 고뇌도 없을 텐데.)
소로는 학교운영을 하면서 "나는 같은 인간의 이익을 위해 가르친 게 아니라 단지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이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라고 말한다. 또한 사업을 해봤지만 "사업이 궤도에 오르려면 10년은 걸릴 것이고 그때쯤이면 나는 아마 악마로 타락해 있으리라라는 것을 알았다"라고 말한다.
(90면)
결국 자신의 생계를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소로는 "나는 월귤을 따는 일로 생계를 꾸려가는 게 어떨까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 일이라면 나도 잘할 수 있고, 수입은 얼마 안 되지만 나한테는 충분할 것 같았다. 그 일은 밑천도 거의 들지 않았고, 내 일상적인 기분에서 벗어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친구들은 망설이지 않고 사업을 시작하거나 전문직을 택했지만, 나는 월귤을 따는 일이 글들의 직업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중략) 나는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있고, 특히 자유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또한 빠듯하게 살아도 잘해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중략) 요컨대 우리가 소박하고 현명하게 산다면 이 땅에서 생계를 꾸려가는 일은 고생이 아니라 오락이라고, 나는 신념과 경험으로 확신한다. (중략) 나는 누군가가 나 같은 생활방식을 택하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 (...) 나는 세상 사람들이 되도록 다양한 삶을 살아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 자신만의 독자적인 생활방식을 찾아내어 그 길을 따라가기를 바란다." (92면). *월귤(cowberry, 열매)
소로의 이 말이 오늘 나의 사유가 될 것 같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현재 처한 상황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말이다.
그가 말한 일상적인 기분에서 벗어나지 않는 일.
현재로서는 나에게 그 일은 설거지 아르바이트이고 식당 홀서비스이다. 사실 홀서빙도 나의 감정을 써야 하는 일이라서 좀 더 빨리 몸과 마음이 같이 고단해진다. 결국 몇 달째 홀서빙대신 다른 일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 나. 물론 그 일은 생계와 취미생활을 책임져야 하므로 안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르바이트 두 개를 하며 몸은 고단하지만 나는 나름의 경제활동을 하게 됨으로써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할 수 있게 됐다. 원하는 책을 마음껏 눈치 보지 않고 사도 되고, 주말 하루쯤은 시부모님 돌봄에서 당당히 벗어나 외출할 수 있으며 그림 그리는 취미생활을 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것은 "일하는 며느리"가 되어서 이제는 하루에도 몇 차례 씩 나를 찾던 시부모님의 관심을 벗어나게 됐다는 것이다.
몸은 고단해도 결혼하고 살아왔던 20년의 생활보다 지금이 덜 힘들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주변에서 왜 예전처럼 치과위생사로 병원에서 일하거나 취득한 보육교사나 요양보호사를 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설거지보다 그게 더 보기 좋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지 않느냐고. 자식들이나 남 앞에서 더 당당하지 않겠냐고.
나도 그 말이 무엇인지 안다.
그래서 해보려고도 잠시 생각했다.
그런데 나라는 사람은 아직 마음 쓰는 일이 힘들다.
20년의 우울증과 무기력함,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는 나를 움츠려 들게 만든다.
그나마 이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서서히 나를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겉보기 좋은 직업을 찾기보다 내가 상처받지 않고 단단해질 수 있는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남들 눈에 한심해 보이거나 딱해 보여도 나는 나 자신의 존재 감각을 지키기 위한 삶의 방식을 택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시간이 지나 내가 더 단단해지면 나는 사람들과 함께 마음 쓸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예술-창조공유공간"에 대한 꿈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지금 이 시간을 묵묵히 견디고 이겨내며 성장과정 중에 있다.
그 중심에는 "새벽독서"와 "매일 쓰기"가 있다.
오늘은 은유 작가의 <쓰기의 말들>이라는 책을 읽어보기로 한다.
며칠 은유 <해방의 밤>을 이어 읽었는데 사회문제의식에 대한 이야기가 연속으로 나오는 부분이라 읽다 보니 마음이 많이 무거워져서 오늘은 좀 한 템포 쉬어가기로 한 것이다.
우선 표지가 딱! 갖고 싶게 만드는 소장욕을 자극하는 디자인이다.
마치 더듬더듬 모음, 자음 하나하나 골라가며 진중하게 써 내려가는 모습 같기도 하고 너무 쓰고 싶은 게 많아 다다다다 키보드를 누르다가 오타가 난 것 같기도 한. 내가 느끼기에 이런 중의적 느낌의 표지 디자인이라 썩 마음에 든다.
책등까지 그 느낌을 이어가 <ㅆ 쓰기의 말들 ㄹ>이라고 써넣은 것까지.
그리고 제목아래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라는 소제목까지 쏙! 마음에 든다.
글쓰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눈길이 멈출 수밖에 없는 문장.
프롤로그를 읽으며 나와 은유 작가의 내적 친밀감이 상승한다.
이유인즉 은유 작가도 소설을 안 본다는 것.
그녀는 "분량 대비 건질 문장이 없다"는 뻔뻔스러운 말을 늘어놓는다고 말하며 자신은 "다독가라기보다 문장 수집가로, 서사보다 문장을 탐했다"라고 말한다. (11면)
이 얼마나 솔직한지!!! 나 역시 서사보다 문장이고 그 문장으로 몇 시간 몇 년을 곱씹으며 사는 사람이므로.
나는 우선 집중력이 약해서 소설의 큰 줄기나 다양한 인물이 나오면 머리가 어지럽고, 이해가 안 되거나 중간에 흐름이 끊기면 다시 처음부터 읽어서 흐름을 타야 하는 성향이라 소설을 잘 못 읽는다.
또한 주인공에 감정이입이 심해서 읽다가 주인공이 너무 비참하면 나 조차도 비참해지고 고통스러워져서 힘들다. 소설을 읽으면 몸과 마음, 일상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우울하거나 심각한 드라마나 영화도 거의 보지 못한다.
산문, 에세이, 시 정도만 겨우 읽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독서 편 식이 심해서 그간 깊이 있는 책이라고는 잘 안 읽었는데 요즘 새벽독서를 하면서 철학, 인문학, 고전에 대한 책으로 나의 독서편식을 조금씩 고치고 있다.
물론 나의 성격상 나를 붙잡는 문장이 나오면 진도를 못 나가고 그 문장을 붙잡고 나에게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시간이 길다. 그래서 한 시간을 읽어도 몇 장 진도가 못 나간다. 그래서 천 페이지가 넘는 <아미엘의 인생일기>도 언제까지 읽을 수 있겠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도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그런 깊이 있는 책을 읽기로 마음먹고 하루 5장이라도 읽을 수 있다는 현실에 감사하다.
이런 변화가 나는 즐겁고 감사하다.
부족한 나라는 걸 인정하고 나아지고 싶어서 시작한 새벽독서.
하루하루 나아지는 나를 보면서 피곤해도 행복하다.
나를 응원해 주는 많은 분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2시간 수면시간 줄여서 하루가 뿌듯하고 정신과 마음이 한 뼘 더 자란다면 잠은 꼭 지금 자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졸리면 낮에라도 짬짬이 잘 수 있다.
밤늦게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보지 않고 바로 자게 되니까 오히려 더 정신적 디톡스가 된다.
은유작가가 필명을 왜 "은유"라고 지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은유 작가가 "논증이나 사변과는 거리가 멀고 문학 작품과도 같이 암시와 은유적 서술, 생략, 파격적 구문 등으로 생동"하는 니체의 글에 도취되어 충. 동. 적으로 '은유'라는 필명을 지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니체가 은유 작가에게 어떤 문장을 들려줬냐면, 다음과 같다.
"고뇌하는 모든 것은 살기를 원한다"
"행동하는 자만이 배우기 마련이다."
"모두가 가야 할 단 하나의 길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기만의 길을 가는 이는 누구와도 만나지 않는다" - 니체
은유 작가는 말한다. "평범한 내 인생도 그랬다. 내 삶은 글에 빚졌다." (18면)
나 역시 이렇게 매일 무언가를 쓰면서 내 삶을 치유하고 있으니 은유 작가처럼 글에 빚지고 있는기 마찬가지다.
다행이라면 글은 내게 이자를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마감은 지키라는 무언의 독촉은 한다.
은유는 어느 학인이 지독히도 삶에 휘둘렸던 자기 체험을 글로 정리하고 나서 한 말을 인상 깊게 듣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에 품위를 부여해 주는 일이네요"
남들이 알아봐 주지 않는 나의 고통, 그 고통이 하찮은 것이 아닌,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지금의 내가, 앞으로의 내가 되어가는 거라는 증거가 되는 일.
바로 그 고통에 품위를 더해주는 것이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상처받은 여린 영혼들이 하나씩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리고 여린 영혼이 견뎌온 삶의 고통과 슬픔을 글을 쓰면서 치유해 나가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
글을 쓰는 모두는 그렇게 "존재의 펼침을 욕망"(91면)하며 오늘도 쓰고 있을 것이다.
나를 포함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보면 사연 없는 글이 없고 아픔 없는 글이 없다.
다 저마다의 슬픔의 바다를 허우적거리며 건너고 있다.
열심히 헤엄치다 기운이 빠질 때쯤, 망망대해에 혼자 있는 느낌이 들 때쯤,
우리는 하나의 부표를 만난다.
여기저기 떠있는 부표는 누군가의 댓글이고, 하트이고, 응원이다.
하지만 그대가 그런 부표를 던지지 못한다 해도 괜찮다.
그저 저 멀리 어디서에서라도 나의 이런 사투를 아련한 마음으로 지켜봐 준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힘이 난다.
참고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열림원 2022. 10쇄
참고> 은유 <쓰기의 말들> 유유 2019. 12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