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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독 17일차] 몸이 설교가 되도록, 해하지 않는 삶

핸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아미엘 인생일기>, 은유 <해방의 밤>

by 윤서린

오늘은 새벽독서의 방법을 조금 달리 바꿔본다. 실험을 하는 것이다.

원래는 어제부터 책 세 권을 2시간 정도 읽고, 글을 1시간 30분에 마무리하는 루틴이었는데 시간이 부족했다. 글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출근해야헸다. 읽어야 할 책 한 권을 늘려서일까?


책 세 권을 읽고 생각을 다시 글로 정리하려면 다시 복기해야 하는 시간, 책의 내용을 다시 들춰봐야 하는 시간, 사진을 찍어서 글과 매치시키는 시간, 글 교정하는 시간 등...


결론적으로 새벽시간 3시간 30분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오늘은 한 권을 읽으면 바로 그 내용을 쓰는 것으로 루틴을 바꿔보려고 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쓴 <월든>의 경제생활에 대한 부분 중에 오늘은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생필품'에 대한 작가의 정의, 사업, 사람이 옷을 입는 목적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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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타락하게 하고 힘을 약화시키고 파괴하는 사치의 본질은 무엇인지 작가는 고민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생필품은 식량, 집, 옷, 연료이고 그 외 여분의 필수품, 사치품을 얻기 위해 자신의 삶을 고단함으로 밀어 넣는 대신 "인생의 모험"을 떠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물질에 얽매이지 말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사람들이 편안할 정도로 따뜻하게 사는 게 아니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덥게, 그야말로 요리될 정도로 뜨겁게 산다. 그것도 단지 유행을 좇느라 그러는 것'이라고 한탄한다.


지금 우리 주변만 봐도 실내온도를 초여름처럼 설정해 놓고 지내는 가정들이 있다. 겨울인데 반팔 반바지차림으로 계절을 잊고 산다. 나는 적당한 냉기가 있는 공기를 좋아한다. 작가가 말하듯 사람이 요리될 정도로 뜨거운 공기 속에서 호흡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실내온도를 적당히 유지하는 게 지구온난화 예방에 좋다는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나는 겨울은 겨울답게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업"에 대한 이야기로 인디언 행상의 바구니 일화가 등장한다. 백인 변호사가 바구니를 사주지 않자 "우리를 굶겨 죽일 작정이군! 하고 소리치고 나갔는데 "남들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바구니를 만들거나, 사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거나, 아니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다른 물건을 만들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중략) 내 경우에는 (...)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살 만한 바구니를 만들 수 있을까 대신, 어떻게 하면 바구니를 팔지 않아도 될 것인가를 궁리했다. 남들이 성공했다고 칭찬하는 인생은 인생의 한 가지일 뿐이다. 다른 종류의 인생들은 모두 희생하면서 어느 한 가지 인생만 과대평가해야 하는가?"라는 부분이 나온다.


그저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내가 만들면 누군가는 사줄 것 같아서 시작한 일이 과연 내가 원하는 일이고 나에게 충분한 보상을 돌려줄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방향의 삶을 살기 위해 내가 집중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옷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나온다. 사람이 옷을 입는 목적을 뚜렷이 알고 있으라는 것인데 우선 체온유지, 타인의 시선에서 알몸보호가 그렇다. "이런 점만 기억하고 있으면, 옷장에 새 옷을 보태지 않아도 필요하고 중요한 일을 얼마나 많이 해낼 수 있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 (면 31)


아무래도 소로가 내 옷장을 보고 간 모양이다.


입지도 않는 옷, 언제가 입을 옷들로 가득한 나의 옷장. 그것만 삶에서 덜어내도 내 삶이 더 간소해지고 숨통이 트일 텐데. 왜, 무엇이 아까워서 못하고 있는 건지. 실상 옷도 입는 것만 몇 벌 돌려 입으면서 왜 그렇게 옷장을 꽉꽉 채워서 나갈 때마다 옷을 뒤적이고 있는지 말이다. 결국은 익숙한 것, 내 몸에 잘 어울리고 편한 것만 찾게 되면서.


스티브잡스가 괜히 검정목티에 청바지가 입은 게 아니라는 걸 익히 들어서 봐와서 알면서도. 옷을 고르고 사는 그 시간에 그는 더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것에 에너지를 쏟았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는데 말이다.


옷을 사서 쟁여놓을 돈으로 책을 샀으면 뿌듯하기라도 했을 텐데... 지난 시절의 나. 스트레스를 물질로 풀려던 내가 내 발목을 스스로 잡는다. 이제는 그런 소비는 그만해야지. 소로의 말처럼 생필품과 필수품을 제외한 사치품에 드는 돈을 벌기 위해 내 몸을 그만 혹사시켜야지 싶다.


삶을 좀 더 단순하게. 더 명확하게 살자.


어제 읽은 <아미엘 인생일기>의 한 문장을 다시 복기한다. 이 부분은 꼭 글벗들과 나눠야지 생각했는데 글 쓰는 시간에 쫓겨서 미처 이야기하지 못하고 넘어가서 오늘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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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實例)에 따라 행동하라. 마음을 움직이는 것도 감정에 따르라. 사랑 이외의 것에 의해 사랑을 일으키려 하지 말라. 타인을 어떻게 하고 싶다면 스스로 그렇게 되어라.
말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 설교가 되도록.".

타인을 변화시키고 싶으면 본인 스스로 먼저 그렇게 되라는 말이다.

말로만 떠드는 게 아니라 나부터 그렇게 살아라는 말이다.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하는 이야기,

성실해라. 나는 과연 성실하게 내 일을 미루지 않고 잘하고 있나?

공부해라. 나는 무언가를 배우며 나를 성장시키는 삶을 살아가고 있나?

친절해라. 나는 내가 힘들고 바쁜 상황에서도 그 누군가에게 늘 친절함을 유지하나?

긍정의 말, 예쁜 말을 써라. 나는 왜 "피곤해, 힘들어. 더 이상 못해"라는 부정의 말을 내 몸에 달고 사나?

이성적으로 판단해라. 나는 왜 정작 감정의 늪에서 빠져서 사고하고 해석하고 행동으로 옮기길 주저하는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삶에 순응한다는 비겁한 변명으로 나 자신을 방치하며 살았던 것 같다. 분명 그 틀을 깨고 나갈 수 있었음에도 이기적인 며느리라는 말과 시선이 겁나서 그저 순종하고 참고 살아가며 내가 내 삶을 갉아먹던 시기. 그래서 나에게 조차 불친절하거나 긍정적이지 못했던 시기가 있었다.


내가 새벽독서와 <건율원>의 인문학 강의를 들으면서 진정으로 내가 어떤 삶의 방향성을 갖고 나 스스로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의식과 태도를 바꾸고 행동에 옮기며 살자고 다짐하기 전까지의 시간. 그전의 시간은 우리 네 명의 자녀들에게 나는 정말 형편없던 부족한 엄마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나부터 변해야지.

내가 변해야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


네가 너의 삶의 주인이라고.

네가 너의 꿈을 키울 수 있다고.

네가 너를 사랑해 주라고.

네가 세상의 쓰임이 되라고.


이렇게 책을 읽고 바로 글로 이어 쓰니 뭔가 속도가 붙어 오늘은 시간 안에 글을 써서 발행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든다.


이제 읽고 싶은 책, 아니... 처음은 그저 내가 읽고 싶어서 읽은 책이지만 이제는 글을 쓰는 글벗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글을 써야만 하는 나의 가족, 친구, 지인에게, 삶의 의미를 찾는 그 누군가에게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권하고 싶은 은유 작가의 <해방의 밤>을 이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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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밤>을 읽으면서 은유 작가의 여성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 태도, 행동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그녀가 무엇에 뿌리를 두고 글을 써 내려가는지.


오늘은 '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글쓰기에서 피해 갈 수 없는 단골 주제.

'폭력'. 이것은 작가가 이 글에서 말한 체육계 폭력문화뿐 아니라 가정 내 폭력, 학교폭력, 직장폭력, 그 외 사회전반에 걸친 '폭력'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될 것이다.


우리도 돌아보면 이런 여러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나 조차도 그랬다.

그래서 처음 글을 쓸 때는 은유 작가의 말처럼 내 안의 폭력의 멍을 빼는... 나는 이걸 토해낸다고 표현했지만... 그런 시간이 분명 있었다.


내 안의 응어리를 또 해내는 글. 이제 다시 쓰라고 하면 못쓸 것 같은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기억과 감정들의 잔재.

내가 수없이 손가락이 아닌 머릿속으로 썼던 글에는 여러 폭력에 대한 기억, 원망, 분노, 우울, 무력감이 깔려있었다.


손가락으로 그 고통을 글의 연료처럼 아낌없이 태워버리면... 은유 작가처럼 나도 언어로 표현되고, 말할 수 있는 신체"(면 141)를 가질 수 있을까?


그 고통의 시간들이 "글로 객관화시키면서 치유되는 느낌" (면 141)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고민한다. 그것을 써야 할지.

그 고통의 시간을 다시 복기할 필요가 있을지.


브런치스토리에서 글을 읽다 보면 많은 작가들이 삶의 시련과 고통을 넘어 이 자리에 있다는 걸 느낀다.

하나같이 내면의 고통과 싸워 이겨내고 있는 강인한 그들의 글을 읽으며 생각한다.


나도 용기를 내보고 싶다. 나도 나를 글로 치유하고 싶다.


작가는 글 말미에 말한다. "(성) 취하는 삶보다 해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도 세상에 기여하는 방법 같습니다."라고.


폭력의 피해자, 가해자, 방관자, 동조자...

우리가 삶에서 "폭력"이라는 무대에 오르게 된다면 우리는 이 네 가지 역할 말고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내가 폭력에 저항하는 방법은 기록자, 증언자, 연대하는 자, 치유자, 사회운동가, 교육자... 그 어느 쪽일 수 있을까?


누군가를 "해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만으로 네 몫을 다할 수밖에 없다면 세상에 어느 정도 기여할 수는 있어도 마음은 한편은 쓸쓸할 것 같다.


그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내가 기억하는 폭력에 대한 고통의 목소리를 왜곡되지 않게 언어로 표현하는 '나의 기록자'가 되는 일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차츰 내가 나를 치유하고 단단해지면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신체'가 되면 다른 이들의 고통과 시련의 시간을 공감하고 연대하고 치유하는 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꿈을 품어 본다.


그렇게 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새벽에 읽고 쓴다.



덧) 책을 읽고 바로 내 생각을 글로 정리하니 3시간 20분 만에 새벽독서와 글 한편이 완성되었다.

앞으로 이 방법으로 새벽독서와 글쓰기 루틴을 잡으면 출근 시간에 덜 허둥거려도 될 것 같다.



참고> <매일 읽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 니케북스. 2022 1쇄

참고> <아미엘 인생일기> 동서문화사 2006. 1쇄

참고> 은유 <해방의 밤> 창비. 2024 2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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