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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독 26일차] 창조의 시, 세상을 향한 눈꺼풀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은유 <해방의 밤>

by 윤서린

시간이 없다. 새벽 6시부터 <엄마의 유산> 글쓰기 프로젝트 줌회의가 있어서 1시간 만의 시간이 허락된다.

얼른 읽어야 할 책,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을 읽는다.


내가 이 책을 새벽독서로 시작하면서 매일 글을 발행하니 같이 읽고 싶다고 말하는 글벗들이 생기고 있다.


나는 그저 읽은 것뿐인데 누군가에게 내 에너지가 옮겨가는 게 기분이 좋다.


나름 두꺼운 (500페이지) 책이지만 겁내지 않고 나처럼 하루에 몇 장씩만 읽어도 된다.


오늘은 <월든-나는 어디서,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에 대해 읽는다.


그가 처음 월든 호숫가에 손수 오두막을 짓고 첫 밤을 보낸 것이 우연히도 1845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이었다고 한다.


"별로 걸친 것이 없는 이 집의 뼈대는 나를 에워 싼 일종의 결정체였고, 자기를 지어준 나에게 정직한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윤곽만 그린 그림처럼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125면)


어쩌면 우연히 겹친 미국 독립기념일과 소로의 첫 오두막에서의 생활은 본인 자신의 독립과 자립의 실험실을 만들어냈다는 기념적인 일이었을지 모른다.


소로의 집은 월동 준비가 끝나지 않은 상태여서 겨우 비바람만 막는 수준이었지만 그가 1년 전에 방문했던 산장이 떠올랐다고 했다.


"회반죽을 칠하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하는 그 오두막집은 신이 여행하다 들르기에 좋았고, 여신이 옷자락을 끌고 다닐 만한 곳이었다. 내 집 위를 스쳐가는 바람은 산등성이를 휩쓰는 바람이어서, 지상의 음악 가운데 끊어진 선율, 천상의 음악처럼 아름다운 소절만 전해주었다. 아침에는 바람이 쉴 새 없이 불고, 창조의 시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것을 듣은 귀는 드물다. 속세를 벗어나기만 하면 올림포스 산(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산다는 곳)은 어디에나 있다. " (124면)


소로는 세상을 마음으로 들여다보는 현미경 같은 눈을 가졌나 보다. 아니지. 그보다 더 미세한 것들을 포착하고 그 순간을 마음껏 즐기는 현미경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나도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자연을, 내 주의 환경을 바라보고 싶다.


경이롭고 감사한 순간들을 그저 그런 일상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자연의 선물을 매일매일 매 순간 받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소로는 "새들이 없는 집은 양념하지 않은 고기와 같다"는 인도 고대 서사시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며 "나는 갑자기 새들의 이웃이 된 것을 깨달았다. 내가 새를 잡아 가두어서가 아니라, 새들 가까이에 우리를 짓고 거기에 나 자신을 가두었기 때문이다. (...) 마을 사람들에게는 노래를 불러주는 일이 전혀 또는 거의 없는, 더욱 야생적이고 감동적인 숲 속의 노래꾼들인 개똥지빠귀, 풍금조, 방울새, 쏙독새, 그 밖의 많은 새들과도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새들의 노랫소리, 나도 소로처럼 새들의 노랫소리를 좋아한다.

소로는 어찌 새들의 이름을 다 알까?


내 소원 중 하나는 얼른 AI가 진화해서 새 울음소리를 들려주면 바로 사진과 이름을 알려주는 서비스가 생기는 거다.


거기에 한 술 더 뜨면 내가 수집한 새소리를 기반으로 "우리 동네에 사는 새 지도"를 만들어주는 어플이 생겼으면 좋겠다. 이곳에 가면 몇 시쯤 이 새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이렇게 여러 사람들에게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나는 이런 엉뚱한 상상을 잘하는데 언젠가 이 글이 "성지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동네에 사는 새 지도"

부디 기술자가 있다면 만들어주소서.


우선 우리 집은 4층 다가구 주택으로 나는 4층에 산다.

워낙 땅바닥에 붙어서 사는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이라 4층도 나한테 너무 높다.

뒷집 옥상뷰가 보이는 거실 창은 내가 엄청 싫어했던 뷰다.

탁 트이지 못한 시아와 건넛집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여서 맨날 커튼을 치고 살았다.


어두침침한 거실... 몇 년을 그렇게 살다가 작년에 갑자기 암막커튼을 싹 다 뜯어냈다.

남편은 겨울에 춥다고 뭐라 했지만 나는 단호했다.

시선만 가려줄 작은 리넨커튼으로 바꾸고 그 틈으로 들어와주는 햇살과 건너편 뒷산의 풍경을 보았다.


좁은 건물 사이로 빼죽 고개를 내미는 나무들의 계절 변화는 나의 숨통을 틔어주었다.

거실 바닥에 자리를 잘 잡고 누우면 운 좋게 달도 볼 수 있었다.

그때부터 답답하다고 싫어했던 거실 창문뷰가 좋아졌다.


언젠가의 먼 미래에 있는 전원주택의 커다랗고 시원한 경치대신 지금 현재에 내가 누릴 수 있는 경치를 마음껏 누려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바보같이 왜 4년 동안 불평불만으로 작은 액자 같은 자연의 풍경들을 못 본 체 살았을까.

이제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현재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마음껏 누려야지.

그래서 창문 난간에 "새 모이통"을 달았다.

새가 날아와 앉을 나뭇가지가 없는 집이지만 새들이 찾아오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몇 주간은 아무도 날아오지 않았지만 얼마 후 참새 두 마리가 단골이 되었다.

낮에 먹이를 놓아두면 운 좋게 녀석들이 다투며 먹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짹짹짹 지저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참깨만 한 모이를 주둥이로 쪼아서 껍질을 밖으로 퉤- 뱉는 모습도 귀엽다.


책에서 새 이야기에 나온 김에 모이통을 채워두고 책상에 다시 앉는다.

바람이 불어서 다이소에서 사다 달아놓은 풍경소리가 아침햇살을 뚫고 들어온다.

평온한 주말. 멀리서 표고버섯을 판다는 야채트럭장수의 스피거 목소리가 조용한 주말 아침을 깨운다.



오늘은 1:1 독서모임이 있는 날.

은유 <해방의 밤>을 읽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인데...

나는 아직 60%밖에 못 읽었다.


문자로 급 죄송하다 고백했다. 최대한 읽어서 가겠다는 다짐을 하고 책상에 다시 앉는다.

사실 책만 읽으면 금방 읽을 수 있는 분량인데, 읽고 생각하고 새벽독서 글로 발행하려니 더디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 안의 내용들이 한 에피소드당 2-3장 분량이지만 그 무게감은 몇 톤이라서 진도가 쉽게 나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애써 외면하려 했던 것들에 대한 문제를 은유 작가가 들춘다.

아프다. 아파서 겁이 나니 소독하는 대신 꽁꽁 싸매고 덮어 놓고 싶은 상처 같다.


오늘 읽은 부분도 그렇다.

고층 아파트의 외벽을 칠하는 공중작업자에 대한 이야기다.

나도 이 이야기는 뉴스에서 봤다.


도색 작업을 위해 아파트 옥상에 설치된 밧줄을 한 주민이 커터칼로 끊어서 작업자가 사망한 사건.

세상이 몇몇 사람들 때문에 미쳐 돌아가는구나 싶었다.


사망자가 안쓰러웠고 남겨진 가족들이 걱정되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뭔가 사회가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나와 거리가 있었다.


은유 작가처럼 나도 아파트 외벽을 칠하는 작업자가 개미처럼 외벽에 아슬아슬 매달려 작업할 때 혹시나 벌어질 상황이 겁나서 시선을 얼른 거두었다.


소설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존 버거가 이주노동자를 빗댄 표현을 은유 작가가 빌려와 말한다.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들" - <존버거 - 제7의 인간, 65면>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인가.

끊임없이 대체 가능한 물건처럼 갈아 끼워지는 노동자들의 목숨은 죽어도 죽은 게 아니라니.


"우리나라는 안정장치를 하는 것보다 목숨값이 쌉니다."라고 말하는 또 다른 노동현장의 희생자를 둔 어머니의 말은 나의 마음을 더 무겁게 누른다.


나는 은유 작가의 <해방의 밤>을 읽으면서 자꾸 외면하고 싶은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자꾸 들쳐보게 되고 고민하게 된다.


사실 이런 책은 불편하다. 왜 불편하냐면 나는 그런 문제에 방관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방관자인 게 창피하고 거북하고 못마땅하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이 책을 다 읽어 볼 것이다.


가려졌던 거실의 커튼을 떼어내고 건물 틈으로 들어오는 태양을 보았듯이,

세상을 향해 닫힌 나의 눈꺼풀을 조금씩 떠볼 것이다.

<해방의 밤>이라는 안경을 쓰고.


참고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열림원 2022. 10쇄

참고> 은유 <해방의 밤> 창비. 2024 2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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