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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그래 Nov 12. 2024

머리카락에 대한 단상

마흔 후반이 넘어가니 흰머리들이 머리카락을 들추지 않아도 자신들의 존재감을 뚜렷이 나타내기 시작했다.

원래 머리카락의 태생은 흰색이고 자라 나오면서 색소가 덧입혀 나오는 거라는데 아무래도 내 두피 색소공장이 노화되고 있나 보다.

최근 더 빠르게. 올해 후반부터 오른쪽 가르마 부분에 흰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보이면서 나의 신경을 건드렸다.  

갑자기 1년 사이에 너무 늙어버린 것 같은 서글픔.


내 머리카락은 탈색해서 염색한 갈색모와 뿌리 쪽 자라나 온 내 본연의 검정모, 그리고 얄궂은 몇 가닥의 흰머리가 차지하고 있다.

처음에는 가르마 부분의 흰 머리카락 몇 가닥이 눈에 거슬려서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미용가위로 오려내곤 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면 영구의 땜빵 머리처럼 될 처지여서  더 이상 잘라내거나 뽑는 것을 포기했다.

그렇게 한동안 보냈더니 내 눈에 어느새 익어서 그런지 몇 가닥의 흰머리가 오히려 포인트 머리처럼 느껴졌다.  (사실 자기 최면에 걸려든 건지도 모른다.)


그러다 며칠 전 짧은 내 머리카락,  특히 오른쪽 가르마의 볼륨감이 멋지다고 말해준  사람이 있다.  

우리 여섯 식구의 휴대폰 업무를 맡아서 해주시는 여사장님으로 나와는 10년 정도 안면이 있다.  “고객님, 와~ 헤어 스타일 일부러 그렇게 하신 거죠.  완전 멋진데요~”  

나는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랐는데 아마 머리를 안 감고 나갔는데 칭찬을 받아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저녁에 감고 잤던 머리가 붕 떠서 본래보다 하늘로 향하고 있긴 했는데 그게 하필 흰머리카락의 지분이 많은 오른쪽 머리카락이었다.

뜻밖의 칭찬 덕분에 나의 흰머리 사랑은 익어가는 대봉감처럼 조금 더 봉긋 커지고 내 마음속에서 말캉하게  잘 익어갈 것 같았다.

원래 백발, 회백발 머리카락에 대한 로망이 있던 터라 나는 그 순간 나의 흰머리를 더 더 사랑하게 됐다.


나는 본래 머리카락이 검다. 아주 검어서 내 누리끼리한 피부와는 상극이다. 검은 머리 상태로 누군가를 만나면 어디 아프냐, 초췌해 보인다며 생기 없는 나의 낯빛을 안쓰러워했다.  나는 그 소리가 너무 듣기 싫었다.  그래서일까 성인이 된 이후로  쉬지 않고 계속 염색을 했다. 네 번의 임신, 출산의 시간 빼고 거의 내 온전한 머리색으로 살아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 몇 년 전 이효리의 “블랙"이라는 노래를 듣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컬러렌즈를 끼고 염색한 머리로 살아가는 남들이 예쁘고 멋지다고 말하는 자기의 모습은 본래  자기 자신이 아닌 것 같다는 고민을 담은 노래다.

나 또한 “생긴 그래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그 본연을 사랑하며 산다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그래서 염색을 멈추고 잠깐 검은 머리카락을 유지해 봤는데 역시나 거울 속에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 나이 드는 것이 맞는 것일까?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것.

그걸 받아들이는 것과 생긴 그대로의 나로 온전히 살아가는 것.


나는 지인을 오래간만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하던 중에 위와 같은 고민을 얘기했다.

그분은 내게 의학기술이 발전했고 자기 투자의 개념으로 의학과 돈의 힘을 빌어 자신의 삶을 가꾸며 살아가는 게 뭐가 잘못된 것이냐.  그것도 다 자기 자신을 아끼고 가꾸고 사랑하는 방법 중에 하나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방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서 살짝 나를 뒷걸음치게 했다.  왜냐면 이 분은 나보다 나이가 십 년 넘게 많았는데 눈가에 주름 하나 없이 탱탱한 피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다 다음번에 만나면 이 분이 나보다 더 어려져 있을 것 같은 괴기함이 느껴졌다.


나는 나의 외모 가꾸기가 괴기함으로 넘어가지 않는 선에서 줄타기를 잘하며 나이 들고 싶었다.

그러다 며칠 전 그 선을 밟고 넘어가는 일이 생겼다.

사람은 왜 화가 나면,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기 머리카락을 제일 먼저 떠올리는지.

머리를 빡빡 밀어보면 어떨까 원장님께 말했더니 두상을 만져 보곤 고개를 흔드신다.  (반년 전부터 얘기했는데 번번이 거절당한다)

안 그래도 투블록 숏커트 머리에  3mm 바리깡 날로 옆머리와 뒷머리를 밀어 놓은 상태인데 그 이상은 무리라며 나를 말렸다.

과거에 다른 미용실에서 짧은 스포츠머리로 자른 후 (그 원장님도 말렸는데 그날은 내가 아쉽게 이겼다.) 3~4개월 모자를 눌러쓰고 다녔던 기억이 떠올랐다.

더 이상 짧아지는 건 무리고 뭔가 변화를 줘야겠다 싶어  인생 세 번째 탈색을 감행하며 ’애쉬그레이‘ 그러니까 알기 쉽게 희게 보이는 밝은 연회색 머리로 염색을 했다.


생각보다 색은 잘 나왔는데 이 머리가 유지 기간이 엄청 짧으니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했다.  잘해야 일주일.  ‘애쉬그레이’ 색이 빠지면 탈색모인 노랑머리색이 서서히 나올 것이다.

그럼 나는 본전 생각이 나서  배가 쫌 아프고 노란 머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또다시 염색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밝은 그레이색 머리로 염색을 해 본건 20년~30년 후의 내 모습이 궁금해서였다.


나의 로망대로 60대에 회백색 머리가 되어 추후 백발이 될 가능성이 몇 퍼센트일까 생각해 보면 안 될 확률이 더 높아 보였다.

멋진 회백색의 머리가 되려면 머리카락의 80퍼센트 정도가 회색, 흰색이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때까지 기다리기도 지루하고 무엇보다 백발노인이 될 때까지 내가 살아있을지도 의문스러웠다.


아빠가 59세의 연세에 갑자기 돌아가신 후 나의 생명의 데드라인은 누가 정해준 것처럼 59세에 맞춰져 버린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아빠처럼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마흔 후반에 접어들면서   마음이 더 조급해졌었다.

그동안  살림이 나아지면, 애들 다 키우고 나서 나 혼자 홀가분해지면,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일, 가보고 싶었던 곳, 배우고 싶었던 일 등… 그때 가서 홀가분하게 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긴 세월을 버텼었다.


딸이자 엄마, 아내이자 며느리로 살아간 세월.

늘 나는 나중이었다.

맨 나중.


그래서 뭔가 이렇다 할 내 취향, 내 취미, 나에 대한 투자가 없었다.

삶이 향기도 없고 색채도 없는 무색무취의 맛이었다.


무미의 그 삶을 벗어나게 해 준 건 어쩌면 나의 짧은 투블록 스포츠머리일지 모른다.

취향 없이 가슴까지 길렀던 머리, 흘러내리는 게 귀찮아 늘 질끈 묶고 다녔던 머리, 검은 머리카락이 싫어서 늘 밝은 갈색으로만 염색하고 살았던 머리.

6년 전 어느 날 배우 진서연님의 숏컷 머리 사진을 들고 가 이대로  잘라달라고 했을 때 어색해하고 후회할 거라고 만류하던 디자이너의 표정이 아직도 떠오른다.  

결국 다른 미용실에 찾아가서 부탁했고 괜찮을 것 같다는 한마디로 내 불안을 잠재워준 디자이너 선생님의 손길에 나는 긴 머리카락과 영영 이별했다.

바닥에 잘려 떨어진 머리카락은 고단하고 수동적인 삶을 살았던 내 과거와 함께 쓰레받기에 담겨 휴지통으로 들어갔다.

후회, 미련 따위 바리깡으로 윙~ 밀어버리고 6년째 짧은 머리로 살아가는 나.


남편은 내가 머리를 짧게 자른 후 사람이 변했다고 한다. 내 스스로도 뭔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삼손은 머리카락이 잘리면 힘을 잃는데 나는 오히려 머리카락이 길면 힘이 빠지고 무력해지는 것 같았다.

짧아진 머리만큼 씩씩해 보이고 싶었고, 주도적으로 삶을 살아봐야겠다는 용기가 솟았다.


나는 2주에 한 번 미용실로 달려간다.

내 삶이 잡초처럼 무성한 고민과 번뇌에 사로잡혀 귀 옆 머리카락으로 자라 오른 거 같을 때.

그 1mm가 나의 신경을 거스를 때 나는 어김없이 미용실을 예약한다.


원장님이 더 이상 밀곳도 없는데 하시며 내 귀옆, 뒷머리를 깔끔할게 밀어 올릴 때 나는 정신없는 내 삶이 정돈되는 느낌을 받는다.

원장님께 머리숱을 쳐달라고 부탁한다.  이젠 숱 칠 머리카락도 얼마 없다며 머리카락을 뒤적이는 원장님께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과감하게 해 주세요~” 이렇게 부탁하고 어깨 위로 떨어져 내리는 머리카락을 바라본다.

그러면 왠지 머리카락도 내 삶의 무게도 몇 그램은 가벼워진 것 같다.

  

거울 앞에선 내 모습에 홀가분한 미소가 번진다.

원장님이 단골이라고 5천 원 할인해 줘서 더 웃음이 나는걸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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