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그러니까 2024년 10월 28일 월요일 저녁에 동네책방에서 작지만 큰 북파티가 있었다.
문화평론가이자 시인이신 황정산 시인의 첫 시집 출간 기념 북토크였다.
나는 문학의 사전의미조차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어중이지만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특히 시인에 대해 궁금했다.
무엇보다 이제 이곳을 떠나는 책방의 마지막 북토크에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주말까지 일에 치여 쉬고 싶은 무거운 몸과 마음을 다잡고 참석한 것이다.
그곳은 벌써 인원이 가득 차 겨우 내 몸 하나 비집고 들어갈 공간만 있었다.
멀리서 퇴근해서 급하게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책방에 기타와 낮은 노래가 울렸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그래서 그런지 기타 소리와 목소리도 시를 낭송하는 것 같다.
시낭송 회원분이 음악 위에 황정산 시인의 시를 올려 읊는다. 내가 텍스트를 눈으로 읽었을 때와 사뭇 달라서 놀랐다.
‘시는 소리와 호흡으로 완성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데 이곳저곳에서 추가로 낭송하겠다는 분들이 일어선다. 알고 보니 전부 시인들이었다. 나는 시인들에 둘러 싸여 있다. 그래서 그들이 낭송하는 시를 귀로 듣고 눈으로 담고 가슴에 진하게 물들일 수 있었다.
황정산 시인님이 쓴 시에 대한 짧은 이야기는 시를 이해하는데 더 많은 도움이 됐다.
시집 뒤편에 급하게 받아적느라 휘갈겨 써 내려간 시인의 말을 오늘 다시 펼쳐보니 마치 어제의 가을밤이 다시 살아나 꿈틀거리는 것 같다.
시인은 시는 짧아야 하며 독해야 하고 불량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정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계산된 시를 쓴다고 했다. 그래서 많이 못쓴다고 했다. 건축하듯 하나하나 벽돌을 올리듯 써 내려간 시.
슬프고 나약한 감정을 정제해 그 안의 자신의 감정을 독자에게 들키지 않으려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내 안에 담겨있는 이야기들을 작은 사유의 돌멩이로 채워진 깔때기에 쏟아부어 조금 걸러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야기가 시가 되려면 말이다.
24년 전 류시화 시인의 책 <한줄도 너무 길다>를 통해 알게 된 일본 하이쿠 시를 사랑하게 되면서 나의 시에 대한 갈망은 커졌다.
2016년에 나태주 시인을 만나고 잠깐 시의 씨앗을 마음에 품었다. 그러다 이정하 시인께서 당시 중학생이던 둘째 딸의 습작을 몇 번 봐주신 덕에 그때 나도 덩달아 시라는 걸 막연히 써보고 싶다고 끄적였었다. (사실 둘째 딸을 시인님과 만나게 했던 게 나의 큰 실수였다. 곧잘 글을 쓰던 그녀는 그 후 자신의 글이 “시”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다 더 이상 쓰지 않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엄마에게 보여주지 않기로 결심한 걸 지도 모른다. 부디 아직 뭔가를 쓰고 있길 기도하지만 이제 이런 섣부른 짓은 하지 말아야지 싶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신의 선택과 결단이 아이를 위한거라고 말하지만 그게 아니라는걸 뒤늦게 깨닫고 후회한다. 나역시 그렇고.)
어제 모인 시인들과 함께한 가을밤의 좋은 여운 덕분인지 나는 조만간 다시 시를 쓰게 될 것 같다.
형식이나 틀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어차피 배워도 그렇게 못 쓰고 안 쓸 텐데.
요즘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림자와 햇살, 하늘, 바람, 나뭇잎의 일렁임, 꽃들의 프러포즈, 이름을 불러달라고 아우성치는 작은 들풀들의 성화에 나는 그들의 말씨앗을 모아 마음의 땅에 조금씩 뿌려보려 한다.
때론 새싹이 올라오기도 하고 때론 새와 굼벵이의 먹이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게 두렵다고 해서 시의 씨앗을 뿌리는 걸 그만 두어서는 안 된다.
씨앗 없이 절로 싹트는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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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나태주 시인을 만나고 돌아와서 쓴 시가 있어서 안그래님들에게 보여드립니다.
부끄럽지만 당시 시를 쓰고 싶다는 제 마음을 담아 써 본 시입니다.
싹을 틔우고 누군가의 씨앗이 되고 싶은 소망이 있는 늘그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