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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그래 Oct 15. 2024

삶을 견디는 기쁨으로

뭔가가 꿈틀거리는 2023년 어느 겨울날이었다.

20년 가까이 우울감과 무기력으로 삶이 눅눅해서 도저히 뭔가를 읽어낼 수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는데 2023년 가을부터 나는 뭔가가 읽고 싶어졌다.

마흔 살 훌쩍 넘어 처음으로 도전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끊겨있던 삶의 회로가 살짝 연결된 느낌을 받던 때였다.


그해 여름에 햇살을 피해 누워만 있던 나는 끊었다 먹었다 반복했던 우울증 약봉지를 쓰레기 통에 스스로 던져버렸다.

그래도 공황장애를 동반한 무호흡증으로 죽을까 살짝 쫄아서 ‘필요시 약’은 한 봉지 지갑에 넣어두었었다.

사는 게 죽는 것만큼 힘들어서 죽고 싶었는데 사실 나는 누구보다 살고 싶었다.  잘…


책을 좋아했지만 어린 시절 문학전집과 셜록홈즈 시리즈를 읽었던 기억을 제외하고 성인이 되어 완독 한 책은 베스트셀러를 요리조리 비켜가며 읽은 몇 권이 다였다.

워낙 속독을 못하고 단어 하나 곱씹어  소여물 씹듯이 되새김질하는 게 내 특기여서도 그랬고 가장 큰 이유는 우울증으로 집중력이 떨어져서였다.

신문기사 몇 줄을 이해 못 해서 같은 기사를 반복해서 읽어야 했기에 나는 크게 좌절했다.  그 후로 문자로 된 것은 읽지 않기로 아니 읽지 못하는 상태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내가 뭔가를 읽고 싶어졌다.

인스타에서 책을 소개하는 작고 예쁜 공간의 독립서점이 눈에 띄면서부터 그들이 소개하는 책들에 관심이 생겼는데 그 서점들은 하나같이 너무 먼 곳에 있었다.

아쉬움이 커갈 때 내 안에서 가까운 곳에서 답을 찾으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들렸다.  이때다 싶어 나는 네이버에 우리 동네 독립서점을 검색했다.

쇼핑몰에 입점해 있는 대형 서점이 집 가까이에 있었지만 나는 뭔지 모르게 책방이라는 공간에 가고 싶었다.   

그 안에서 숨겨진 뭔가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이 나를 책방으로 이끌었다.


내 기대와 다르게 찾아간 그곳은 주상복합 건물 2층에 위치한 작은 책방.  그것도 책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쌓여있는 어수선한 이삿날 풍경으로 나를 맞이했다.

창문 안으로 보이는 분주한 책방지기의 몸짓을  지나가는 척 왔다 갔다 하며 힐끗힐끗 훔쳐봤다.   

유리창에 붙어있는 <핀란드의 크리스마스 그리고 핀란드 디자인>이라는 북파티 안내문이 초대받지 못한 나의 발 끝을 붙잡았다.

최근 몇 년 북유럽의 문화인 “휘게”에 마음을 빼앗겨있던 나였기에 그 초대장은 나를 위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지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한참을 망설이다가 미친 척 문을 밀고 들어섰다.  

평상시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용기였다.

그런 용기가 무색하게도 책방지기님의 첫인사는 이곳은 예약제 방문이라 오늘은 보시다시피 책정리 중이고 이용이 어렵다는 답변이었다.  


소심하고 조그만 나는 그만 부끄러워져서 지하주차장까지 순간이동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색한 목인사를 하며 재빨리 눈동자를 굴려 책방의 모습을 내 눈에 스케치해 주섬주섬 담고 돌아서는데 책방지기님 종이컵을 내밀었다.   

추운 날 소득 없이 되돌아가는 헛걸음이 안돼보였는지 급하게 차를 한 잔 타주신 거였다.  근데  그 차가 참 미지근했다.   

찻물이 100도까지 끓어오를 동안 참지 못하고 차를 타 내온 그 책방지기님의 분주함과 책방을 찾아준 것에 대한 고마움, 돌려보내는 미안함 이런 것들이 섞여서 내 손에 들고 있는 종이컵의 무게가 마셔도 마셔도 줄지 않는 느낌이었다.


너무 빨리 식어버린 종이컵을 들고 서둘러 나오며 북파티 안내문을 찍었던 나는 어느새 북파티 장소에 앉아있었고 그곳에 온 다양한 사람들에 섞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나는 그들과 너무 다르다는 생각에 움츠러들었고 더 작아졌다.   내 안의 세상이 너무 좁아서 실망했고 보잘것없는 하루살이 같은 내 삶이 누추했다.  

하지만 이런 내 속마음과 다르게 그들은 별 것 없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들은 직업, 성별, 나이에 상관없이 책으로 자신의 삶을 나누었다.  나는 그 모습이 부러웠다.

이런 사람들과 어울려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도 뭔가 지금보다 삶이 뽀송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나와 책방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책방에 드나들며 나는 ‘서가회원’이 되었고 책장 한 칸을 내가 선별한 책들로 채울 수 있었다.  그런 내 책장을 가득 채운 책이 바로 헤르만 헤세의 “삶을 견디는 기쁨”이었다.

제목만으로도 내 삶 전체를 관통하는 버팀목이 되었고 지치고 기댈 곳 없는 인생에 큰 힘을 얻었다.  밑줄을 그으며 마음에 새기고 책모퉁이를 접으며 마음을 다 잡았다.

각자의 삶에 치여 자기가 누군지 방황하는 주변 지인들에게도 추천했다.


책 속의 글자들은 작고 가볍지만 그 무게감은 그와 반비례한다.

나는 삶을 견디는 게 괴롭다고만 생각했지 기쁨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었다.  하루하루 버티고 살아가는 게 끝없는 터널처럼 막막하고 두려웠다.

하지만 헤르만 헤세의 글을 읽으며  마치 인간 내면의 고뇌에  스스로 빠져 치열하게 이겨내고 고찰한 어느 예술가의 삶의 찬가를 눈앞에서 보는 듯 느껴졌다.

우리가 버리고 싶은 삶도 가치가 있으니 살아보라고.  나도 그래서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견뎌냈고 견딜 수 있다는 그 자체로도 기쁨이라고.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같이 견뎌보자고 말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삶을 버텨 나갔고 이제는 나 스스로 삶을 일으켜 세우고 있는 중이다.

책방을 통해 시작한 글쓰기 모임을 통해  글 쓰는 세계에 첫 발을 들였고 글을 쓰고 기록하면서 내 삶의 가치를 더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나는 하루하루가 기억 속에서 흩어져 사라지기 전에 그 하루의 기억을 알알샅샅이 쓸어 담아 작은 씨앗으로 만들어 내 마음의 텃밭에 뿌린다.

그리고 작은 애벌레가 되어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새싹들을 먹이 삼아 무럭무럭 자라날 것이다.

그래서 “삶을 견디는 기쁨”이라는 버팀목에 매달려 번데기가 되고 나비가 되어 날아갈 준비를 할 것이다.

번데기를 벗고 날아가는 내가 비록 화려한 나비가 아닌 작고 초라한 나방이 되더라도 나는 나를 응원한다.  

있는 그대로.  나의 삶을 일으켜 세우면서.  조금 더 높이 조금 더 멀리 날아가 보고자 한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작은 씨앗 하나를 누군가의 마음 한구석에 심는다.  


같이 꽃 피우고 같이 날아가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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