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두 곳이 있는데 그중에 한 곳이 카페 방향이다.
그곳은 작은 산을 끼고 있는데 수십 년 넘은 밤나무, 아카시나무, 소나무가 살고 있다.
보통 동네 산책할 때 걸어가는 코스인데 요즘 도통 바빠서 잘 지나가지 않았었다.
오늘 우연히 그쪽 방향으로 차를 몰고 가다가 낯선 풍경이 스쳐서 세워 보니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가 꺾여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나와 15년 정도 같은 동네에 살았기에 내 마음은 조금 무거워졌다. 엊그제 비바람에 쓰러진 걸까? 수년간 태풍에도 끄떡없었는데...
나는 고개 숙인 소나무를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모진 태풍, 바람, 태양 다 받아내며 견뎌왔지만 이제 더 이상 작은 바람에도 버틸 힘이 없었던 걸까?
나는 왜 소나무가 스스로 고개를 숙인 것만 같은 슬픈 생각이 들까? 소나무에게 인사하고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오늘의 소나무를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어 두었다.
토도록! 톡! 밤나무의 밤이 가을 햇살에 영글어 떨어지는 소리! 한쪽에서는 생을 마감하며 고개를 땅에 대고 한쪽에서는 생을 잇기 위해 땅에 생명을 떨어 뜨린다.
아름답고도 슬픈 가을의 풍경. 2024년 9월 27일
며칠 후 11살 막내아들에게 쓰러진 소나무 소식을 전하며 그곳에 함께 갔다.
그런데 이미 소나무는 정리되어 한쪽 구석에 제 모양을 잃은 채 쌓여있었다.
아들은 너무 아쉬워하며 나무가 쓰러져있던 빈 땅을 찍었다. 그곳에 떨어진 수십 개의 찌그러지고 밟힌 솔방울만이 이곳이 소나무가 있던 자리였다는 것을 소리 없이 말해주고 있었다.
막내는 “아… 뭐야… 더 빨리 와 볼걸. 근데 이건 기억해 둬야 하니까 사진으로 찍어야겠다 엄마”하며 잔가지가 남아있는 땅과 솔방울, 한쪽 구석에 쌓여있는 소나무 더미를 몇 장 더 찍었다.
이 사진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금세 이 소나무를 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도 눈에서 잊히고 있는 순간이리라.
그 후 지인과 함께 카페에 갔다가 쓰러진 소나무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는 뒷산으로 향하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종종 벤치에 앉아 소나무를 바라봤던 우리기에 우리는 그 소나무를 추모할 권리와 의무가 있었다.
그러다 소나무가 있던 자리에 모여있는 올망졸망한 아이들 한 무리를 보았다.
선생님과 함께 자연 미술 놀이를 하러 나온 모양이다.
제 각각 손에 들린 종이로 뭔가를 열심히 그린다. 그런데 그 많은 나무 그림들 속에 쓰러진 소나무는 없었다.
나는 존재감을 잃은 소나무 생각에 조금 쓸쓸해졌는데 그것보다 더한 슬픔이 앞에 있어 주춤 발을 멈추었다.
주차장 가장자리에 피어 자라던 작은 아카시나무. 그 나무가 감쪽같이 없다.
가느다랗지만 나보다 키가 컸던 아카시나무가 몸통이 사라진채 뿌리만 땅에 짓이겨져 끊겨 있었다.
‘무슨 일이야 이게…
무슨 일이지… ‘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래도 쓰러진 소나무를 정리하러 왔던 중장비 차가 아카시나무도 밀어버린 것 같았다.
한 두해 전 주차장에 아카시 씨앗이 날려 싹을 틔웠고 쭈뼛쭈뼛하지만 씩씩하게 뿌리내리고 살던 아카시나무였다.
나는 무엇이 아카시 나무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생각했다.
주차할 때마다 빗겨서 주차해야 되는 번거로움과 공간의 차지에서 오는 인간들의 불편함 또는 처음부터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뿌리내린 잘못된 선택의 결과.
뭐가 됐든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벌어진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오래된 소나무 한그루가 쓰러졌는데 나비효과로 인해 작은 아카시나무도 삶이 껶여버린 순간을 목도하는 순간의 처연함.
이제 이곳을 올 때 쓰러진 소나무와 뽑혀 버린 아카시나무를 떠올리게 될 걸 생각하니 마음이 더 쓸쓸해졌다.
과연 쓰러진 소나무는 작은 아카시나무의 영혼에 손 내밀어 주었을까?
그래서 그들은 쓸쓸하지 않게 이 가을을 넘어가고 있을까?
도대체 죽은 나무들의 영혼은 어디로 가는 걸까?
혹시 짓이겨진 솔방울의 씨앗에 머물다 새로운 소나무로 나란히 싹 틔우진 않을까?
언젠가 쓰러진 소나무 자리에 새로운 소나무가 자라난다면 나는 한여름 밤에 조용히 와 볼 것이다.
그러면 왠지 그 소나무에서 익숙한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 같다.
한여름 밤공기에 섞인 소나무향 속 숨은 은은하고 잔잔한 아카시꽃의 향기를.
2024.10.27. 글쓰기 모임에서 이 글을 낭독하다 문득 그리워진 나의 아카시나무. 사진첩을 뒤적여 찾았다. 바람 살랑이던 초여름 6월 18일 아카시나무 아래 손흔들며 웃던 내 모습이 담긴 영상. 이제 그 나뭇잎의 찰랑임을 다시 못 보겠지... 벌써 그리워진 나의 아카시나무.
새벽에 눈이 떠져 인스타 뒤적이다가 발견한 아카시나무의 또다른 흔적. 카페 창문에서 보이던 가느다랗고 잎도 없던 아카시나무. 위에 사진이랑 비교해보니 여름에는 엄청 잘자라서 잎도풍성했었구나 싶다. 영상에서는 아카시나뭇잎들이 바람에 춤추는 모습이 찍혀있다. 이제는 그 춤을 볼 수 없다.
2024. 1월. 주차장 가운데 서있는 갸냘픈 아카시나무. (사진 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