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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그래 Nov 16. 2024

우리 아이가 난독증이라고요?

한글은 누구나 학교 가기 전에 저절로 떼는 거라 생각했다.

우리 넷째가 8살, 초등학교 1학기 후반쯤 난독증이라는 판정을 받기 전까지.


넷째 아들은 띠동갑인 큰누나와 작은 누나, 여덟 살 차이의 형이 있는 우리 집 늦둥이다.

나는 나름 애 셋을 키워본 배테랑 엄마라는 프레임이 씌워진 네 아이이 엄마였다. 

애 셋이 그랬듯이 당연히 넷째도 어린이집에서 한글을 배울 거라 생각했다.


첫째 때는 첫 육아의 열정에 불타 올라서 낱말카드 하나하나 손수 손코팅해서 한글공부를 시켰었다.

비상금은 몽탕 그림책 전집을 사는데 영혼까지 끌어 썼다.  그때는 40권 넘는 그림책 택배 상자도 번쩍번쩍 들어다 장롱 안에 남편 몰래 숨겨놓고 하루 두세 권씩  꺼내 책장에 새로 꽂아두고 큰 아이가 잠들 때 계속 읽어주는 나름 교육열이 있는 엄마였다.

그래서인지 두 살 터울인 둘째 딸은 태어나서 두 살 때부터 완벽한 문장을 구사해 동네 어른들에게 언어영재라고 칭찬받았다. 

하지만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시아버지 밑에서 노골적으로 "아들"은 꼭 낳아야 한다며 "손자"에 대한 기대와 강요를 받던 내 마음은 깊어진 우울증으로 아팠다.


그토록 바라던 셋째가 태어나고 시어른들은 나에게 아이를 바로 이어서 갖길 바랐다.  아들 기운이 아들이 부른다는 이상한 논리를 들이댔다.   시어른들은 손자 하나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본인들의 아들 하나가 어려서 하늘로 떠나고 우리 남편 혼자 남았기 때문에 못해도 아들 둘은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나와 남편은 늦둥이에 대한 계획만 있었을 뿐 성별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나는 시어른들의 아들 밑에 아들 낳는다는 절대적 이론에 부합하지 못할까 봐 넷째를 미루고 미루다 내가 더 이상의 출산이 버거워질  나이에 도달할 때쯤 용기를 내서 넷째를 낳았다.


사람들은 형제가 많으니 막내가 당연히 사랑 듬뿍 받고 자랐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12살, 10살, 8살의 나이차만큼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 나이차는 엄청났다.  

넷째가 유아기에 자기주장이 강해지면서 울며 떼쓰는 날이 많았고 사춘기에 접어든 큰 애들은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속담의 증인이라도 되듯 울며 보채는 막내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친정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신 일과 시어머니의 큰 사고, 그로 인한 장애로 인해 간병해야 하는 상황까지 겹치면서 거의 몇 년간 정신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가 터지면서 넷째의 아동기는 그야말로 혼란한 시기의 연속이었다.

가정도 불안정했고 사회에서도 따뜻한 보호와 관심을 받기 어려운 나날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넷째를 어린이집과 학원에 보내며 초등입학 준비를 선생님들에게 맡겨두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학원을 들쑥날쑥 출석하면서 한글 떼기가 더뎌지고 있었다.   반복적으로 자음과 모음을 따라 쓰고 나와도 집에서 한글 익히기 포스터를 따라 읽고 쓰고 낱말 카드를 읽었지만 큰 진전이 없었다.  

아이는 스스로 뭔가를 읽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묻는 단어카드는 찾아오고 그림책도 잘 보는데 글을 읽거나 쓰는 데는 큰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한글자음모음표를 보며 읽고 그림책 제목도 따라 읽으니 곧 원리를 깨우치면 금방 한 두 달 사이에 한글을 깨치겠거니 했다.  주변에서도 남자아이들이 유독 한글공부를 싫어하고 늦게 한글을 떼는 아이들도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우리 아이가 그런 케이스라고 생각했다. 


나는 한글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자 아이가 좋아하는 포켓몬카드를 이용한 한글놀이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음모음표의 순서를 거꾸로 읽어보게 했더니 아이가 눈만 꿈뻑이며 답을 못했다.   

나는 아차 싶었다.  내가 뭔가 큰걸 놓치고 있었구나.  나는 아이에게 다시 중간 부분의 자음을 가리켰다.  그리고 재빨리 아이의 눈을 살폈다.  평소 자음, 모음을 하나씩 짚어가며 물어볼 때 워낙 뜸을 들이다 답했는데 나는 그게 넷째가 혹시 답이 틀릴까 봐 신중하게 답하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날 아이의 눈동자가 얼마 바쁘게 기억(ㄱ)부터 이응(ㅇ)까지 왔다 갔다 반복하며 지읒(ㅈ)의 이름을 기억 속에서 불러오려 애쓰는지 보고 말았다.    


나는 한글 자음모음판을 순서대로 읽고 따라 하는 방법이 아닌 끝부터 거꾸로 따라 반복해서 읽고 쓰는 것, 단순히 학습지 따라 쓰던 것에서 벗어나 자음과 모음을 결합시키고 해체시키는 그림 카드를 만들어며 한글을 처음부터 다시 가르쳤다.

아이가 제발 하루라도 빨리 한글의 원리를 알아채길 바라면서.


하루는 같이 읽었던 책 제목을 여러 개 종이에 써서 보여주고 읽게 했더니 아이는 방금 전까지 읽었던 책 제목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제목의 글자수를 세어보고 그에 맞는 책 이름을 골라 눈치껏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글자의 음을 가위로 하나씩 오려 섞고 다시 읽어보게 했다. 아이는 금세 당황하더니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서서히 아이의 눈밑이 붉어지더니 윗입술을 꾹 문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였다.  

흐느낌에서 아이가 그동안 책 제목을 따라 읽거나 혼자 읽은 것도 사실은 읽은 게 아니라 간신히 하나하나 그림처럼 외워서 말한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순간 그동안 아이가 이지경일될 동안 눈치 못 챈 내가 한없이 부끄럽고 한심해서 울컥 울음이 새었다.

엄마라는 사람이 아이가 이런 상태인데도 전혀 몰랐다니.

그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되는 거겠지 하며 안일하게 몇 년을 흘려보냈다니.


나는 넷째에게 울음을 들키지 않으려 서둘러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가만히 아이의 어깨를 안아 일으켜 내 무릎 위에 앉혔다.  

아이는 내 품이 넘칠 정도로 어느새 자라 있었다.  


내가 더 세심하게 아이를 관찰하고 의구심이 들 때 어린이집과 학원 선생님들께 상담하고 물어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이는 그동안 한글공부를 하며 얼마나 어린이집과 학원에서 지치고 힘들었을까?

차마 모르겠다고 말하지 못한 그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나는 어떻게 보듬어줘야 할까?


그날 이후로 나는 넷째에게 최대한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선에서  한글원리를 알려주는 영상과 교재를 이용해 한글공부를 시켰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프리패스인 것처럼 여겨지는 한글이 우리 두 모자에게는 흡사 전쟁터에 나서서 쟁취해 내야 하는 낯선 나라의 전유물처럼 비장하고도 처절하게 느껴졌다.


나는 날이갈 수록 얼마 남지 않은 초등학교 입학날이 두려워졌다.

아이는 제 덩치만 한 책가방과 신발주머니를 메어보며 빨리 초등학교에 가고 싶다고 한다.

아이는 본인이 학교에서 겪게 될 어려움 따위는 모르는 건지 알고 싶지 않은 건지 그저 형아가 된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제발 봄이 서둘러 오지 않길 바라고 바라는 나와 하루빨리 봄이 와서 학교에 가고 싶은 아이는 서로 다른 마음이지만 큰 소리로 "아, 야, 어, 여"를 함께 읊었다. 


내 마음속에서  "아야~ (아이야) 어여(어서)~" "아야(아들아)~ 어여(어서어서)~~" 이런 읊조림이 간절함과 함께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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