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매미 울음소리가 내 마음처럼 뜨겁고 따가웠던 2023년 8월의 여름, 나는 40여 년 인생에 생애 첫 아르바이트 면접이라는 큰 도전을 앞두고 지구종말을 목전에 둔 듯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쳐야 했다.
10대 때부터, 아니 훨씬 그 이전부터 나는 남 앞에 서는 걸 두려워했다. 비에 젖은 허수아비처럼 소심했고, 남의 눈은 턱끝에 달려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과의 시선을 편하게 맞추면서 이야기하는 일이 없었다. 간혹 할 말이 있어도 머릿속에서 개미소리처럼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입만 벙긋거리는 아이였다.
시끌벅적한 교실에 숨죽인 그림자처럼 앉아있다 남들 몰래 해 질 녘 그림자처럼 사라지는 게 내 학창 시절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취직해야 하는 게 무서워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한 겁쟁이이자 사회 도피자였다.
고등학생인 동생들과 친구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회생활을 배워갈 때, 나는 “아르바이트할 시간에 공부해서 장학금 타는 게 더 좋은 거 아니야?”라는 궤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뒤늦은 학구열로 20대를 맞이했다.
어느덧 친구들과 어울려 소주 한 잔 마시며 몇 시간 수다를 떨 수 있을 만큼 잘 웃고 활발해졌다. 하지만 내 안에 소심함이라는 빈 잔에 급하게 자신감이라는 물을 채우려다 보니 곧잘 흘리고 때론 급하게 벌컥 들이부어 넘치는 일이 생겼다. 이러다 어느 날 빈 잔이 쓰러지거나 깨져버릴까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졸업이 다가오자 대학병원에 지원할 수 있었지만 상하관계와 직급 체계가 엄격한 관계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피해 나는 다시 겁쟁이이자 도피자가 되어 새로 개원하는 개인 치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작은 병원이라고 해서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든다. 개원 초기 몇 달간 힘들게 오픈 준비했던 여직원들끼리 단합이 잘되어있다 보니 후발 주자로 들어온 나는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올려놓는 얌체처럼 느껴졌을 터였다.
내가 물에 겉도는 기름이 되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는 병원에서 조사한 직원평가에서 내가 그녀들을 제치고 1등을 하는 발칙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축하 대신 내가 마라톤 결승선 앞에서 자신들의 앞을 막고 1등을 빼앗은 염치없는 나쁜 년이라는 타이틀을 새긴 메달을 내 목에 댕강 걸어주었다. 예우는 더 극진했는데 직원휴게실에서 자기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내가 들어가면 바위가 들쳐져 재빨리 갯벌 속에 몸을 숨기는 뻘게처럼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졌다. 당연히 퇴근 후 술자리나 영화관람에 나는 초대되지 못했다.
환자들과 상담하고 진료를 보는 건 적성에도 잘 맞고 즐거웠는데 그녀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냉기가 흐르는 공간 속에서 소리 없이 밥을 꾸역꾸역 먹는 일, 최고참선배의 비위를 맞추며 너스레 떨고 그녀를 칭찬감옥에 가두는 역할에는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했다.
사회생활과 인관관계의 쓴맛을 소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되새김질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나는 선배의 메달을 뺏어간 염치없는 메달리스트에서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로 역할이 하루아침에 바뀌게 되었다.
내 목에 걸린 메달을 목줄로 바꿔 달아 준 건 병원 원장님이었는데 그 목줄은 다름 아닌 최고참의 업무를 내게 인수인계하라는 지시였다. 나는 그녀들의 손에 끌려가서 소리소문 없이 도축당하는 한 마리의 소가 되는 운명을 직감하고 원장님께 찾아가 내가 지금 맡은 직무를 얼마나 좋아하며 내가 최고참의 직무를 넘겨받기에 한없이 무지한 나부랭이라는 걸 며칠간 읍소해야 했다. 하지만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로 역할이 정해진 나는 이미 그들이 나를 위해 기꺼이 준비한 단두대 위에 두 발을 올려놓고 오늘일지 내일일지 모를 최후의 그날을 숨죽여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들은 생각보다 차분하고 냉정하게 나를 처리하였는데 업무 인수인계를 핑계로 퇴근 후 나를 붙잡고 친히 나의 무지함을 일깨워주고자 했다. 특히 내가 접하지 못한 진료과의 전문용어를 폭격기처럼 내 머리 위에 쏟아부었다. 수련의들도 몇 년을 배워야 하는 전문지식을 눈 가리고 코끼리 뒷다리 더듬듯, 뜨문뜨문 수제비 반죽처럼 투박하게 떼어서 내 머릿속에 던져주니 나는 그걸 도저히 익혀서 먹을 엄두도 못 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재료와 레시피를 안 가르쳐준 채 자꾸 나에게 눈으로만 쳐다보고 비법 소스를 똑같이 만들어 내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원장님이 매복 사랑니를 쪼개서 뽑을 때 다음 스텝에 어떤 기구를 손에 쥐어주면 좋아할지 맞추는 게 주특기였다. 환자에게 맞는 보철재료와 예산을 원장님과 환자의 입장을 고려해 적정선을 맞춰주고 상담해 주는 일을 맡았다. 난생처음 스케일링을 받는 어르신들의 어마무시한 치석 덩어리를 떨궈내 뒤 거즈에 전리품처럼 한가득 모아 보여주며 뿌듯해했다. 잇몸을 이불 걷듯 걷어내고 검붉은 염증의 핏덩어리들을 긁어낼 때 쩍! 쩍! 빨아들이며 움찔거리는 썩션의 진동과 소리에 쾌감을 느끼는 외과적 성향의 치위생사였다.
그런 나에게 자잘한 교정장치 수십 개의 이름과 위치를 외우는 일, 교정진단에 필요한 엑스레이 자료를 해부학적으로 파악해 컴퓨터에 입력하고 원장님이 진료할 때 차분하고 교양 있는 표정으로 보조하며 한 번에 수백만 원에 달하는 교정비를 부모들과 상담하고 조율하는 일은 내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 탓에 가만히 둬도 몸이 근질거려 저절로 나가떨어져 나갔을 나일 텐데 그녀들은 친히 나의 멘탈을 쿠쿠다스처럼 잘게 부수는 데 상당한 에너지를 썼다. 나는 일보다 사람이 힘들다는 걸 절실히 느끼며 하루살이처럼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는데 더 이상 버틸 힘을 놓아버리게 되는 일이 생겼다.
누군가가 발신자표시제한으로 내게 비난과 협박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문자를 보낸 주인의 주 요지는 “너 인생 그렇게 살지 마!” “가만 안 둬”였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최고참이나 그의 추총자인 누군가가 보낸 것일까? 아님 그 모두가 돌아가면서 내게 보내는 것인가? 그런 일을 한동안 겪고 나니 나는 마음속에 있는 빈 잔에 금이 가서 더 이상 그 어떤 물도 담을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사람이 무서운 게 싫어서, 살기 위해서 그곳을 빠져나와 결혼이라는 도피처로 숨어 들어가 23년을 운둔한 채 보냈다.
소심한 내가 권위적이고 감정기복이 심한 시아버님을 모시고 사니 내가 파 놓은 무덤에 내가 제 발로 걸어 들어가 빠져나올 생각을 못하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런 내가 수년간 우울증 약을 먹다 끊다 반복하며 무기력에 늘어져 있을 때 누군가는 먹고살 걱정이 없으니 팔자가 편해서 그렇다고 했다.
아이넷을 키우며 시부모님을 모시고 하루 10시간을 남편 채소농장에서 채소를 손질하고 수백 개의 채소 박스를 옮겼야 했다. 매일 뭘 먹어야 할지 고민하며 일하시는 분들 두 끼 식사와 새참을 챙기는 살림꾼이자 일당백의 일꾼으로 살아온 고단한 삶이었다.
고단한 삶에 더한 시련이 찾아왔다. 시어머님의 자전거 사고로 우리 가족은 한순간 벼랑 끝에 놓였다. 가족경영이었던 채소농장은 일손이 없었다. 더 이상 씨앗은 뿌려지지 않았고 자라나던 채소는 수확시기를 놓쳐 땅에서 썩어 버려졌다. 버려진 땅에서 자라난 무성한 잡초처럼 우리 가족의 마음에도 생계와 간병이라는 뿌리 깊은 잡초가 뻗어 나 자라고 있었다.
거동을 제대로 못하시는 시어머님의 간병과 심리적 충격으로 더 예민해진 시아버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자 내 마음은 뿌리 썩은 화초처럼 다시 시들고 있었다.
또한 몇 년 전 갑작스레 하루 만에 패혈증으로 돌아가신 친정 아빠처럼 내 인생도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괴로워했다.
나는 이 현실에서 도피하듯 끝없는 잠에 빠져들었다. 하루의 절반 넘는 시간을 진정제의 안온함 속에서 누워있었다. 이렇게 몇 년을 흡사 살아있는 시체처럼 보냈다. 일어나서 뭔가를 할 여력과 기력이 없었다. 겨우 일어나 애들 학교 보내고 늦은 저녁 허기질 때쯤에야 굶지 않을 정도의 간단한 밥만 차려 주었다. 안방이 치우지 않은 계절 지난 옷가지와 짐들로 채워지자 나는 막내와 거실로 나와 피난민처럼 생활했다.
내가 피폐해지자 아이들도 생기를 잃었다. 각자의 방에 들어가 태풍에 휩쓸린 부표처럼 우울의 바다를 표류하며 서 로가 서로를 방치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더 이상 내가 나와 내 아이들을 방치해서는 안돼. 이제는 부당한 어른들의 대우에 참지 않을 거야! 고맙다는 말없이 당연시 받아들이는 내 역할을 벗어던질 거야! 이제 나도 나답게 살아야지! 그래! 그래야지! ‘
‘나도 뭔가 할 수 있을 거야. 그걸 찾아서 도전해 볼 거야.
내가 해내야 아이들도 세상에 나갈 용기를 낼 거야!‘
엄마도 하는데 나도 할 수 있어! 이런 마음이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당근 어플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찾아봤다.
이거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거라면!
수차례 면접 지원 포기 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하던 나는 어느새 생애 첫 아르바이트 면접에 성공하고 1년 넘게 식당주방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알바 8개월 차에 우황청심환을 먹고 홀서빙이라는 새로운 알바에 발을 들여 사람들 속에 섞였다.
여전히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 속에 나를 숨기는 소심한 나지만 나는 계속할 것이다.
나를 다시 살게 해 준 이 허드렛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