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과 '하필'은 사랑의 속성

[읽고 쓰는 삶 218일 차] 박연준 산문 <소란>

by 윤서린

비가 오는 날에는, 특히 새벽에 빗소리가 창문 너머로 들릴 때에는 시인의 글을 읽는 걸 좋아한다.

어제 혼자 카페 나들이를 가서 메리 루플의 <가장 별난 것>을 읽다가 메리 루플을 좋아한다는 박연준 시인이 떠올랐다. 박연준 시인이 떠오르면 요조가 생각나고... 뫼비우스 띠처럼 요조-박연준-메리 루플이 무한 반복이다.


아마 올해 가을은 박연준 시인을 알아가는 계절이 되지 않을까.

아직 그녀의 시는 모르지만 그녀의 산문 몇 권을 드문드문 아껴 읽으며 나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간다.

그녀의 마음결을 스치다 보면 문득 그 안으로 빠지고 싶어 질 테고. 그러면 그때야 그녀의 시를 읽을 준비가 되는 것이다.


박연준 산문 <소란>

[하필, 이라는 말]


이 글은 사랑에 관한 글이고 2013년 여름, 비 오는 날에 쓰였다.

어릴 때 싫었던 장마가 이제는 퍽 좋아졌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누군가에게 쫓기다가 비로소 숨을 만한 곳을 겨운 찾은 은둔자의 긴장 섞인 안도감. 이어 느껴지는 조금의 지루함과 피로. 이런 기분 재미있잖아요?". (29면)


비 오는 날을 노곤함을 사랑하는 나는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장맛비를 뚫고 그녀의 사랑을 뒤쫓아가 본다.


"예전의 당신과 내 모습을 회상해 보다 왠지 치아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기도 했어요." (29면)


그때 나는 어렸고, 오래 죽어 있었고,
가끔 살아나면 소란스러웠지요.



이 문장을 읽으며 깨달았다.

나 요즘 꽤나 소란스러웠다고.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재잘거렸다고.

죽어 있던 내가 그들을 만나면서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내향인이 됐다고.

아... 나.... 살아나서 신났었구나. 좋았구나!



"물밖에 내놓은 물고기처럼 파닥이며 요동치는 나를 알아봤지요. 하필. 하필이라고 말을 하고 보니 참 좋네요. 어찌할 수 없음. 속절없음이 사랑의 속성일 테니까." (30면)


사랑은 한곳에 심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을
생각한 내가 마음에 듭니다.


하필. 어찌할 수 없음으로 시작되어 끝을 맺은 사랑을 시인은 노래한다.

그 어찌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라고.


작가는 장마가 지나가고 더 맹렬하게 '푸른 독'을 뿜어낼 여름의 소멸을 이렇게 표현한다.


"계절이 반복된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습니다. 여름이 가을에 잡아먹히면 그다음은 차가운 미소를 짓는 겨울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안심이에요. 자꾸 잡아 먹혀도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닐 거예요." (34면)


독서 노트를 기록하면서 몇 줄의 생각이 덧대졌다.

따로 글을 떼어내서 <알알샅샅이 기록한 하루>로 옮겨보려 한다.

빗소리 때문인지 박연준 시인의 문장들 때문인지 마음이 잘익은 홍시처럼 말캉해지는 아침이다.

누군가가 건드리면 톡 하고 얇은 껍질이 터져버려 손쓸 수없게 흐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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