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는 삶 229일 차] 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의 죽음 후 기록한 메모들로 만들어진 책. <애도일기>
나는 진정한 "애도"를 하고 있는 것인지, 어떤 식의 애도의 과정을 거쳐야 내가 그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펼쳐서 읽을 용기는 없었다. 내 안의 마음을 그의 글을 통해 들키게 될까 봐.
나는 "애도"라는 말로 몇 년 전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아빠에 대한 원망과 죄책감을 지울 수 있을까?
누군가를 향한 나의 "애도"는 순수할 수 있을까.
23살에 전쟁미망인이 되어 롤랑 바르트를 홀로 키워낸 그녀, 그녀는 롤랑 바르트의 병간호를 받으며 투병생활 끝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날부터 노트를 사등분한 메모지를 지니고 다니며 자신의 심경을 글로 짧게 남겼다.
아래의 문장은 주변 사람들이 그가 어머니를 잃고 슬픔에 빠진 모습을 보고 그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이 느껴졌을 때 쓴 메모글이다.
한 사람이 직접 당한 슬픔의 타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측정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우습고도 말도 안 되는 시도)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자의 슬픔의 깊이를 어찌 주변인들이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장례식장에서 소리 내어 울며 곡을 하지 않는다고 잘못된 애도는 아닐 텐데. 덜 슬픈 게 아닐 텐데.
사람들은 그런 단편적인 모습을 보고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자기 멋대로 측정하기도 한다.
나는 가끔 가족들의 장례식에서 과장된 누군가의 슬픔을 봤다. 감히 과장된 슬픔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평소해 보였던 고인에 대한 태도, 배려, 관심, 애정도를 고려해서 나온 결론이다.
이상하게도 병상에 누워있을 때조차 병문만도 오지 않고 평소에는 연락도 방문도 없던... 기억도 희미한 그들이 핏줄이라는 명분하에 남겨진 가족들의 슬픔을 자신들의 잣대로 멋대로 측정할 때,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장례식 내내 간섭할 때, 남겨진 가족들의 잔잔한 슬픔을 쥐어짜는 곡소리로 덮어버릴 때, 나는 그들을 보며 구역질이 났다. 머릿속으로 수차례 그들을 장례식장에서 끌어내는 상상을 했다. 자신의 슬픔이 가장 큰 것처럼 과시하는 것은 진정한 애도가 아니었다.
작가는 어머니의 시신을 운구하다 운구차의 기사들의 식사를 위해 잠시 정차한 사이 그곳 주변을 걷다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아빠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었다.
아빠의 죽음을 통한 슬픔을 넘어선 저편에서 귀가 찢어질 것 같은 내 마음의 절규를 들었기 때문이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나는 절실히 살고 싶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던 내 삶이었고, 어떻게 죽을 수 있을지 고민하던 내가 살고 싶다니.
그토록 죽고 싶었는데 처음으로 덜컥 죽음이 겁났다.
나는 살고 싶어진 내가 두려웠고 그것을 아빠의 죽음을 통해서 깨닫게 됐다는 것에 괴로웠다.
죽어서 떠나는 아빠의 영혼을 붙잡고 삶으로 건너온 딸. 그게 나였다.
나는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살고 싶었다. 아주 잘... "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나를 암흑 속에 가두었기에 차라리 죽는 것이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기에 늘 죽음을 생각했다. 하지만 난 그 누구보다 살고 싶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의 죽음을 통해 뒤늦게 알아버린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조금씩 용기를 냈다. 더 이상 나를 옥조이는 환경과 폭력에 나를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힘든 상황 속에서 나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행동하는 것이 여전히 겁이 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를 위해 뻔뻔해지겠다고. 내가 나를 살리겠다고.
어떤 죽음 통해 나는 "살고 싶어지는 마음"을 수혈받는다.
너무 살고 싶어져서 미안하다.
나는 살아있다.
그리고 여전히 살고 싶다. 잘.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사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