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는 삶 250일 차] 한강 <빛과 실>
새벽 2시경 여수에 도착해서 잠깐 눈을 붙이고 한강 작가의 책 <빛과 실>을 펼친다.
여수에 와서 한강 작가의 책을 읽는 건 작년에 이어 두 번째다. 그때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을 기념하며 여수의 한서점에서 <여수의 사랑>을 구입해서 읽었었다.
그때의 느낌이 좋아서 이번 여수행 짐을 싸면서도 한강 작가의 책을 챙겼다. 너무 무겁지 않고 가벼운 책. 하지만 섬세하고 아프면서도 따뜻한 책, 아껴 읽던 그 책을 오랜만에 다시 펼친다.
——————————————————————————
3월 21일
화단이 마당 북쪽에 있어서, 나무들이 햇빛을 볼 수 있도록 거울 세 개를 놓았다. 남중하는 햇빛이 느리게 거울을 지나가면 창문 같은 빛이 벽에 비친다.
3월 22일
(…) 호스타는 용맹하게 자라고 있다. 겨울 내내 마치 말라죽은 것 같았는데, 부활하듯 땅을 뚫고 나와 힘차게 솟더니 이제 그만 결기를 풀듯 잎사귀를 천천히 펼치고 있다.
3월 25일
블루베리꽃 봉오리가 햇빛을 받은 아래쪽 가지에서만 부풀고 있기에 오늘은 거울의 각도를 올려주었다. 매일, 매 순간 빛이 달라진다.
3월 29일
감동적일 만큼 아름답게 자라고 있는 어린 단풍나무. (…) 물론 가냘픈 건 여전하다. 하지만 십 년쯤 지나면 처마에 닿을 만큼 커지고 굵어질 것이다. 그럴 가능성을 씨앗에서부터 지닌 나무. 죽지 않는다면, 살아남는다면, 마침내 울창해진다.
_ 한강 <빛과 실> 101~106면
——————————————————————————
한강 작가가 사는 작은 한옥에는 아주 작은 화단이 있다. 그곳에는 빛이 잘 들지 않기에 작가는 거울을 이용해 빛을 반사해 나무들에게 비춰준다. 날짜가 지날 때마다 거울의 각도를 조금 달리해 주면서 그 빛을 필요로 하는 꽃과 나무들에게 선물하는 것이다.
나무를 가꾼다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단순히 잘 자라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닌 긴 장마와 뜨거운 열기, 혹한 추위 속에서도 버텨주기를, 그래서 마침내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다 꽃 피우고 울창해지길 바라는 마음, 그런 보살핌과 응원의 마음이 아닐까.
꽁꽁 얼어붙은 땅 속에 뿌리를 내리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더라도 한 줄기 빛을 모아 비춰주는 마음만 있다면 그 존재는 죽음을 건너 다시 부활하게 되는 순간을 맞을지도 모른다.
작가가 찍은 사진 속에는 그녀가 놓아둔 거울의 빛이 비치고 있다. 그 창문 같은 빛을 받아먹고 자라는 건 비단 그늘진 곳에서 자라나는 나무만이 아닐 것이다. 차가운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우리들 역시 그녀가 모아준 글이라는 빛으로 매일 조금씩 자라난다. 마침내 피어난다.
——————————————————————————덧) 아침 독서를 하는데 이른 잠에서 깬 초등학교 3학년 조카가 내 옆에서 그 모습을 유심히 보길래 읽고 있던 한강 작가의 책을 보여주며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지한 표정과 궁금증이 가득한 눈빛에서 나는 어떤 반짝임을 보았다. 그 순간이 너무 예뻐서 앙증맞은 아이의 손을 기록에 남겨본다.
이 아이가 자라서 한강 작가의 책을 펼칠 때 지금 이 순간을 떠올려 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해 봤다. 그리고 울창하게 자라날 이 아이의 가능성에 작은 빛을 비춰줄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 아침, 여수에서 읽고 쓰다. SYR&SM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