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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라노 Oct 29. 2022

남편 분, 어떻게 만나셨어요?

광속택시 아저씨가 이어준 인연

서른 살의 여름날, 


소개팅을 했었다. 상대방은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가 센스 있게 주문한 이탈리아 음식은 맛있었지만, 대화는 편하지는 않았다. 형수님이 교직원이시라 3년이나 쉬었음에도 조카가 분리불안을 많이 느끼더라, 엄마가 아이와 같이 붙어있는 게 참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뭐 그런 말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나쁜 분은 아니었고, 그가 말한 내용도 결코 무례한 것들은 아니었지만, 내 마음은 불편했다. 그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서른이 되도록 엄마로서 아내로서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채로, 낭만적인 결혼을 꿈꿨던 나 자신이 불편했다. 커피를 마시고, 지하철로 걸어오는 내내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아, 고시를 끝내고 사회에 나왔더니 시간이 엄청 흘렀나 봐. 이제는 연애가 아니라 결혼을 새각 해야 할 때가 된 거고, 설렘, 끌림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라 서로 얼마나 조건이 잘 맞는지를 따져야 하는 시간이 된 건데. 깊은 생각도 없이 소개팅에 나오다니, 너 언제 철들래?' 


뭐 이런 생각들이 밀려들었다. 나도 모르게 2호선 지하철을 거꾸로 탔다. 거꾸로 탔다는 사실도 한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신이 들고 보니, 정 반대방향이었고, 시간은 흘러 벌써 열한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광속택시 아저씨, 무서워요. 저 죽나요? ㅠㅠ


허겁지겁 뛰어서 반대방향 지하철을 탔다. 문제는 지하철은 겨우 탔지만, 환승할 버스가 이미 끊긴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잡았다. 그곳은 술집도, 취객도 많고 위험하게 운전하는 차들도 많은 곳이라 좀 꺼려졌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XX아파트로 가주세요."

"...." 

아저씨는 아무런 대답 없이 액셀을 내리밟았다. 그리고 택시는 부와앙- 소리가 들릴 정도로 빠른 속도로 도로 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신호를 여러 차례 무시했고, 급정거와 급제동을 반복했다. 혼잣말인지 나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욕설을 뱉으면서. 문을 열고 탈출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조용히 핸드폰을 보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척했다. 목적지를 이미 말했는데, 중간에 내려달라고 했다간 알 수 없는 큰일이 날 것 같았다. 택시기사 아저씨가 범인이었던 사회면 범죄기사들이 머릿속에 오르내렸다. 


친한 언니에게 "택시 아저씨 무서워 ㅠㅠ"라는 메시지를 보내다가, 나도 모르게 운전석 앞에 달린 거울을 봤다. 그러다가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는데......충혈된 눈에 적의를 담은 눈동자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팔에 오스스,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주변 지인들에게 문자를 했다."


"전화해서, 나 데리러 온다고 해주라. 택시인데 너무 무서워. ㅠㅠ" 

그런데 그날따라 내 SOS 신청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는 중요한 회식, 누구는 프로젝트 회의, 누구는 아이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배우자 눈치를 보는 상황이라 전화 어려움 등등의, 답문이 날아들었다. 부모님은 이미 주무시고 계셨고, 오빠는, 음, 오빠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사이가 좋지 않았다, 많이).




그러다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

'아, 동친이(동네 친구의 줄임말이다)! 얼마 전에 페북 댓글도 남겨줬는데! 동네에 와있을지도.' 

절박한 마음에 카톡으로 물어볼 새도 없이, 7년 전 당시 알고 있었던 전화번호로 그냥 걸었다. 

'바뀌었을지도 몰라. 그러고 보니 전화 안 한 지 정말 오래되었네.'

 "뚜뚜뚜-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다음 구세주를 찾으며 긴장하고 있던 차에, 아저씨가 쉰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여기서 어디야?"

"아, 아저씨 그냥 저 여기서 세워주세요." 

버스 한정거장 반이 남았지만, 걸어가는 게 덜 무섭겠다고 판단했다. 택시비를 내자마자 아저씨는 아무 말 업이 문을 열어주셨다. 문득 불친절하고 피곤하셨을 뿐, 나쁜 분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리고 나니 긴장은 풀렸지만, 자정 넘어서 집까지 20분을, 높은 힐을 신고 걷자니 좀 힘들었다. 


집에 도착해서 소파에 누웠다. 다리는 아팠고, 머리는 멍하니 피곤했다. 그러던 중 전화가 울렸다. 동인이었다. 

"여보세요?" 

"응, 전화했어?" 

그 녀석이었다. 7년 전 들었던 목소리와 같은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뭐랄까,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마치 매일 같이 전화를 주고받았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만들어준 편안한 공기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투정이 나왔다.   

"왜 전화 안 받아, 내가 얼마나 위험했는 줄 알아?" 

사실 진짜 무서웠던 마음도 있어서 살짝 울먹였던 것도 같다. 

"미안, 빨래하고 샤워하고 오느라 못 봤어." 

조용하고 나긋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투정 부려도 괜찮다는 느낌을 주었다. 

"지금 빨래랑 샤워가 문제야? 나 죽을 뻔했단 말이야!"

"왜? 무슨 일 있었어?"

"택시 아저씨가! (어쩌고 저쩌고...)"

"어구 어구. 무서웠겠다. 나 내일 예비군 훈련이다? 그래서 나 지금 자야 되는데, 내가 내일 전화할게." 

"내일도 빨래하고 샤워하다가 전화 안 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바로 꼭 할게. 빨래랑 샤워 안 할게." 


빨래는 그렇다 치고 샤워도 안 한다니. 그 대답이 퍽 귀엽게 느껴졌다. 동친이와의 전화통화 덕분인지, 그날 꽤나 편하게 잠들었다. 


다음날 전화가 왔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그러다가 만나서 밥을 먹었고, 그러다가 사귀게 되었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나는 어떤 배우자를 만나게 될까? 어떻게 만나게 될까? 혼자 공상을 해볼 때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날 총알택시 아저씨가 무섭지 않았다면,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을 것이고(생각이 나지 않았었다, 평소에는) 아마 지금쯤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때는 무서웠지만, 좋은 배우자와 이어질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저씨. 그래도 다음에는 안전운전 부탁드려요. 정말로 무서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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