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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라노 Jun 25. 2019

나의 존재 이유

연약한 존재를 대변하고 지켜주는 존재

나를 찾아가는 글쓰기 2주 차 과제: "내 삶의 목적"
내가 존재하는 이유, 3-5년 후 모습, 이를 위해 필요한 가치 3가지를 골라 글을 씁니다. 


#믿음, #정의


나는 믿고 있다. 나의 모든 것이 신의 섭리 안에 있다고.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내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 내가 했던 가장 멋진 일들과 가장 부끄러운 실수들, 내가 견뎌야 했던 가장 힘든 순간들과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 그리고 앞으로 내가 하게 될 많은 좋은 일과 나쁜 일, 남기게 될 모든 족적까지 포함한 나의 모든 것이 말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신의 섭리를 이해하고, 내 앞에 주어진 과업들을 신의 뜻에 따라 치열하게, 정성스럽게 해내는 것이다. 혹자는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신실한 종교인이냐고. 그렇게 말하기는 부끄럽다.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고, 그동안 기도도 자주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내 안에는 한없이 선하고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 그리고 그 신의 섭리 안에 있는 나라는 존재의 가치에 대한 믿음이 있다. 그 믿음은 내 삶을 꿰뚫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강렬한 것이다.      



그동안 많이 고민해봤는데, 신은 나를 '연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대변해 주는 사람'으로 길러내 쓰려고 하신 게 아닐까 싶다. 먼저 내 성격적 특징을 살펴보면, 나는 '강강약약' 스타일이다(적어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 강한 사람에게 빌붙어 잘 되기보다는 강한 사람에게도 틀린 것은 틀렸다 말할 줄 아는 자율성을 확보하고 싶어 하고, 약한 사람에게는 힘의 차이를 들어 누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내 성격 중 가장 좋아하는 특징이다. 스포츠 경기를 볼 때도 기존 타이틀을 지키는 챔피언보다 새로 올라온 도전자에게 베팅하는 것을 좋아하는 ‘언더독’ 스타일이다. 얼마 전 오프라 윈프리의 저서 <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에서 ‘약한 편을 승리자로 만드는 걸 나는 너무 좋아한다’는 문장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던지. 나도 비슷한 기분을 느낄 때가 많다.     


챔피언이 또다시 이기는 그런 경기는, 뻔하잖아요.


내 경험을 되짚어 보면, 나는 인생에서 ‘약자’ 일 때가 많았다. 체구가 작은, 여자라서 겪은 괴로운 시간들이 있었다. 일산에서 소중한 지인인 오사부님과 스턴트맨인 웅이아버지와 함께 지하철을 탔는데, 지나가는 행인이 내가 일행이 없는 줄 알고 날 위협한 적이 있었다. 아직도 그 형형한 눈빛과 말투가 기억난다. “XX 년아. 왜 부딪히고 X랄이야. 죽여버린다, 너.”라며 나를 주먹으로 내리치려고 했다. 슬로 모션으로 그의 손이 올라가던 것이 보였다. 스턴트맨이었던 웅이아버지가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내 앞을 막아섰던 장면이 연달아 떠오른다. 자기보다 강한 존재를 발견한 그 행인의 얼굴에서 갑자기 살기가 사라졌다. 그는 혼잣말을 중얼중얼하며 사라졌다. 12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그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굴욕적이었다. 내가 약자라는 사실이. 그래서 표적이 되었다는 것이.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남아있는 집에서 둘째이자 딸로 태어나서 겪었던 차별과 아직 자세히 얘기하기엔 무서워서 봉인해 놓은 내가 겪었던 폭력의 기억도, 나를 약자의 심정에 보다 잘 공감하고, 폭력을 용인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내 장점잘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 봐도 그렇다. 나는 사실 잘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굳이 꼽자면 설득하는 말하기, 글쓰기, 강의하기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부모님이 두 분 다 선생님이셔서 가르치는 말하기에 익숙하고, 어려서 억울한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읍소하는 글을 쓰고 말하는 것은 전문이다. 왜 내가 더 정당하고 정의로운지 주장과 논거를 제시하고 상대방의 주장과 논거에 숨은 모순점과 약점을 찾아서 공격하는 일은, 내가 유년시절부터 몇 백번이고 시뮬레이션 해왔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법무업무를 할 때 형사사건 서면을, 고소인 입장에서 쓰는 게 가장 즐거웠다(다양한 사건을 접하고, 다 잘하려고 노력하기는 한다. 그래도 하면서 특별히 신나는 업무가 있게 마련이니까!).   


다만 나에게 어려운 것은 내 존재의 이유와 나의 일상의 삶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내 존재 이유, 또는 삶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오래전에 확신을 가졌다. 문제는 하루하루 평온한 일상을 깨고 본격적으로 치열하게 살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다. 나는 지금처럼 이렇게, 가끔 연차를 내서 봉사를 하고 보육원이나 시설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에게 지식이라는 무기를 가질 수 있도록 강의를 해주는 일을 하는 것에서 만족하고 싶다. 그런데 좀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연약한 존재인 내 아이들, 내 주변 사람들을 지켜나가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도 내 삶의 방향성 위에 있는 중요한 과업이라는 걸 스스로 좀 더 곱씹어 봐야 할까? 존재의 이유, 죽기 전에 남기고 싶은 일을 고민하다 보면, 자꾸 스케일이 큰 무언가를 하고 싶어 지는데, 일상의 내가 해낼 수 있는 일들은 아직 너무도 작은 것이라서 서글픈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또 좋은 기회와 힘과 동료를 주시겠지. 나는 오늘도 한 걸음씩 작은 발걸음을 떼 본다. 내 존재의 이유를 잊지 않고 새기려 노력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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