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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라노 Dec 24. 2019

수고했어, 올해도. (2019년을 보내며)

2020년에도 잘 부탁해. 


올해는 감사한 일 투성이었다.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좌절했던 일이나 아쉬웠던 일을 포함해 모든 것이, 그저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이런 감정을 느껴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래서 남겨두고 싶다. 2019년에는, 한 해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온전한 기쁨과 행복감, 만족감을 느꼈다는걸.


사실 올해를 시작할 때는 내가 이렇게 행복하게 한 해를 마무리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올해 초에는 그저 이를 악물고 한 해를 버티리라 마음먹었다. 워킹맘 생활은 이제 막 적응이 되어가던 참이었지만, 임신까지 하고 나니 체력적으로 버티기 힘들었다. 그 와중에도 일을 잘해서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 승진하고 싶다는 욕심은 쉬이 접어지지 않았다. 임신 7개월의 어느 날, 사수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같이 할 의사가 있는지 물었다. 따로 여행 계획이 있느냐, 몸은 괜찮냐, 배려해 주면서 정중하게 물어봐 주었다. 거절했어도, 충분히 이해해 줄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자진해서 새로운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뭔가 큰 물살에 내가 쓸려가 버릴 것 같은 불안함과 조급함이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했던 어느 날, 기침이 멈추지 않더니 호흡곤란이 와서 병원에 입원을 했다.


산소포화도가 이렇게 떨어지면 본인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위험해요. 호흡기 치료제를 드릴 텐데, 아이에게 무해하다고 장담은 못 해요. 하지만 투입하지 않을 시에는 확실히 더 안 좋으니까 일단 써보죠.


응급실을 지키던 의사선생님의 말은 나를 책망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나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대체 뭘 위해서, 난 굳이 그렇게 무리를 해가며 일하다가 여기에 와있을까. 하얀 병원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한 편으로는 나 스스로를 원망했다. 그 정도도 감당하지 못해서 이렇게 아프냐. 자기관리도 실력이야.하면서. 우리 큰아들은 누가 데리고 자지? 내가 하던 업무는 누가 하지?부터 시작해서, 나의 입원으로 차질이 생기게 될 일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두 번의 일주일 정도의 입원생활은 생각보다 좋았다. 일단 통잠을 잘 수 있었다. 큰 아이가 태어난 이래 새벽에 2번 이상 깨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푹 자니 아침 공기가 달달하게 느껴졌다. 호흡기 치료를 하는 시간을 빼고는, 책을 읽고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피터님의 신간이 나왔었다. <시작노트>를 읽고 리뷰를 썼다. 조각난 시간을 이어붙여서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앉은 자리에서 한 권을 뚝딱 읽을 수 있는 게 그렇게 행복한 일인지 처음 알았다. 김영민 교수님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었다. 아, <사피엔스>는 완독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유튜브에서 김미경 캠퍼스의 북 드라마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당시 소개되었던 많은 좋은 책들 중에서 특히 브레네 브라운의 <마음 가면>이 마음에 남았다.


사실 조금 길고, 어려운 내용이라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내려갈 때마다 내가 위안을 얻었고, 내 삶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브레네 브라운은 여성들에게 양립하기 어려운 요구 사항들이 여성들에게 사실상 강요되고 있다고 말한다. 자애로운 엄마여야 하고, 능력 있는 직업인이어야 하면서, 동시에 아름답고 날씬해야 한다는 요구들. 이러한 요구들은 때로는 모순되고, 양립하기 어려우며, 이론적으로 양립 가능하다 한들, 현실적으로는 모두 다 해낼 수 없는 것들이다. 문제는 이런 기준을 달성하지 못할 때, 여성들은, '나'는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취약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취약성을 받아들이고 담대하게 온 마음을 다해서 제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맺음 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나는 뒤처지고 있거나, 느려진 것이 아니다. 그저 지금에 맞는 '제 속도'로 가고 있는 것뿐이다,라고. 엄마가 되지 않았으면, 둘째를 낳지 않았으면 아마도 더 자기계발이나 업무에 쏟을 수 있는 시간은 늘어났을 것이다.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업무에 쏟을 시간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다르게 사용하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당연한 말인 것 같지만, 나에게는 큰 깨달음이었다. 그전까지는 계속 뒤처지고 있다, 삶이 요구하는 속도를 내가 따라가지 못한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나를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건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나는 공부나 일을 하면서 나를 찾았고, 그 외의 영역에 있는 나를 하찮게 생각했다. 부모님과 보내는 시간, 오빠와 나누는 대화, 신랑과 함께 하는 시간, 아이를 돌보는 시간을. 의무적으로 보내야 하는, 성과 없는 시간들이라고, 아깝게 흘러가 버리는 시간들이라고 나도 모르게 평가절하 해왔다. 그런 무의식적인 생각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가 보였다.


2019년의 나는 '커리어' '업무'로만 봤을 때는 임시 휴업 상태였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리 크게 걱정되거나 조급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난 언제든지 새로 시작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나의 다른 삶의 단면들은 토실토실하게 잘 커가고 있으니까. 어디 내가 2019년에 이루어낸 성과들을 한번 훑어볼까. 먼저 하회탈처럼 잘 웃는, 활동적인 둘째 아들을 건강하게 낳았다. 그리고 다시 임신전 체중으로 돌아왔다. (만세!) 그리고 살림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계란찜, 된장찌개 등등을 이제 마음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게 되었고, "아이 등원-설거지-세탁기 돌리기-집안 간단히 정리 후 로봇청소기 돌리기-이어서 물걸레 청소기 돌리기- 그 와중 둘째 분유 및 이유식 주기" 루틴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뿐인가. 예전에는 어려워했던 냄새나는 행주 삶기, 화장실 곰팡이 제거, 효과적인 수납- 이것이 참 중요하다. 손을 뻗으면 딱 잡히는 위치에 물품이 배치되어 있어야 한다, 동선과 직관을 둘 다 고려해야 한다!-까지도 신경 쓰는 주부 초단이 되었다. 틈틈이 글을 쓰고, 불러주는 곳이 있으면 강의를 나갔다. 북드라마를 통해 김미경 캠퍼스에 가입했고, 지역 독서모임에 가입했다. 지역독서모임은 걱정 반, 기대반으로 가입했는데 너무도 좋았다. 성실한 동료들을 보면서 자극을 받았고, 힘들 때는 응원을 받았으며,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읽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 재테크에 대한 필요성을 깨닫고 가계부를 쓴 일도 나름 진일보였다. 꽉 차게, 행복한 한 해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2020년은, 경자년 쥐의 해란다. 갑자년생 쥐띠로서 나의 해가 왔다는 느낌이다. 뭔가 더없이 좋았던 2019년보다 더 좋은 한 해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일단 회사에 잘 복귀해서 좋은 사람들과 재미있게 일할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쓸 것이다. 칼럼과 웹 소설을 써야지. 예상치 못하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회사 점심시간과 퇴근 직후의 30분을 값지게, 글쓰기와 운동하기에 쓰려고 한다. 무엇보다 2020년에는…내가 한 약속을 지키고 더 많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그렇게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든다. 나야, 수고했어, 올해도. 내년에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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