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아는 엄마도 이러고 있다.
아이를 낳아봐야 엄마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말,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정말이었다. 나는 엄마가 오빠를 나보다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최우선순위는 오빠고, 그 다음이 나라고. 그래서 상처도 많이 받았다.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어. 그 말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나는 늘 엄마에게 '덜 아픈 손가락'이었으니까.
나와 오빠의 입학식, 졸업식이 겹치면 엄마는 오빠의 행사에 갔다. 비가 오는 날이면, 오빠에게 먼저 우산을 전해주러 갔다. 반찬은 늘 편식이 심한 오빠에 맞춰 정해졌다. 채널 결정권한은 아빠도 아닌 오빠에게 있었다(프로야구와 포청천만 주구장창 봐야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서러움이 계속 내 안에 머물러 있었던 건, 엄마의 애정의 순위에 오빠가 더 높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생각이 반박의 여지 없는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둘째를 낳아서, 길러보기 전까진.
그런데 내가 아이 둘을 낳아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사랑함의 크기 차이가 아니라, 애정의 순번표가 아니라, 긴급함의 우선순위였던 것이다. 첫 아이와 함께 하는 모든 것들은 엄마에게 '긴장'으로 다가온다. 첫 출산, 첫 모유수유, 첫 뒤집기부터 처음 킥보드 태우기까지.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행여 잘못되지는 않을지. 그래서 사실 잘 웃어주지 못한다. 괜찮다고 말하지 못한다. 왜냐면 엄마도 그게 웃어넘길 일인 줄 모르니까. 괜찮은 일이라는 걸 경험적으로는 알지 못하니까.
하지만 둘째 아이와 함께 하는 모든 것들은 엄마에게 '누림'이다. 첫째 때 왜 이 예쁜 모습을 충분히 누리면서 바라봐 주지 못했을까. 그런 마음을 안고, 둘째의 처음을 통해 지나가버린 첫째의 처음을 아쉬워하고, 둘째의 처음을 만끽하며 바라본다. 그래서 둘째가 마냥 더 귀엽다. 둘째가 귀여운 특성들을 갖고 있고 첫째가 그렇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귀여움을 엄마가 바라볼 여유가 있어서 그렇다.
각설하고, 엄마가 되면 둘째를 서럽게 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를 지녔던 나도, 큰 아이의 말에 먼저 반응한다. 둘째보다 첫째가 더 중요해서가 아니라, 더 사랑해서가 아니라, 첫째와 함께 하는 것들이 나에게는 엄마로서의 처음이고, 긴장이 되어서다. 어른들 사랑을 독차지 하던 녀석이 사랑을 나누어 받아야 한다는 것이 서러울까봐 그러는 측면도 있긴 하다.
둘다 예쁘다. 우리 집 두 남자아이는 생김새도, 성격도 달라서 형제라고 말하지 않으면 형제인 줄 모른다. 첫째는 세심하고, 언어를 잘 활용하고, 조심성이 많다. 둘째는 대담하고, 애교가 많고, 눈치가 빠르다. 예쁜 구석도, 장점도 다르고, 내가 첫째와 둘째를 대하는 마음도 어딘지 다르지만, 그 크기를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참, 현명하게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중에 큰 애는 큰 애대로, 작은애는 작은 애 대로, 서러웠다, 차별 받았다, 엄마 밉다, 할 것 같다. 높은 확률로. 그것이 아이들이 엄마에게 가지는 일종의 원망할 권리겠지. 나에게 우는 소리를 한다면 그 건 괜찮은데, 그 것 때문에 마음 어렵고, 자존감이 낮아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는 둘 다 엄청 많이, (온갖 형용사) 사랑해. 엄마가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면, 미안해.
현명하게, 또 넉넉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지혜를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