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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라노 Feb 15. 2022

'엄마 좀 봐주라, 너무 힘들어'라고 말해 버렸다.

내가 제일 듣기 싫었던 말이었는데.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두 아들이 에너지 넘치는 얼굴로 나를 반겨준다. 아이들과 놀아주시던 이모님께 들어가시라고 인사를 드리고는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따라 들어온 큰 애가 옷도 갈아입기 전에 조잘조잘, 말을 걸며 놀이를 제안한다. 


전투기 게임해요. 마리오 카트 게임해요. 난 이 거(큰 전투기), 엄마는 저 거(좀 작은 전투기). 가위바위보!


한 손으로는 가위바위보, 한 손으로는 블라우스 단추를 푸르는 데 이제 4살 된 작은 아이가 아직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추가 업무를 의뢰한다.  


이거 다시 로봇으로 변신해줘.(자동차와 로봇의 모습을 오가는 카봇 장난감. 조립하는 거 너무 어려운 거 아닌가요)


대충 이런 녀석들인데 자동차로도 변신한다.


그러다가 업무 스트레스를 좀 받았던 날. 모처럼 늦게까지 야근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던 날. 큰애에게 말해 버렸다. 


"엄마 좀 봐주라. 너무 힘들어서 그래."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자마자 세수도 안 하고 이불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당황함과 서운함을 반반 섞어놓은 듯한 큰애의 큰 눈망울이 뇌리에 박혔다. 




퇴근하자마자 1시간. 워킹맘에게는 이 시간이 참 중요하다고 한다.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몸으로 놀아주라고. 온정신을 아이들에게만 집중하는 QUALITY TIME을 보내라고. 책에서 그리 배웠다. 그런데 회사 업무가 머리에서 채 지워지기도 전에, 8시간 넘게 쌓였던 나름의 스트레스를 채 비워내고 씻어내기 전에 또 다른 업무가 주어지는 게 나는 힘들다.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쌕쌕 거리며 자는 모습도, 입을 오물오물거리며 김밥을 씹는 모습도, 설거지를 할 때 허벅지에 찰싹 감겨 장난을 거는 모습도 너무도 예쁘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데. 그냥 내가 못난 엄마지 뭐. 부족한 엄마지 뭐. 포기하고 내려놓아도 가끔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엄마 좀 봐주라. 너무 힘들어서 그래." 라니. 엄마가 그런 말 할 때 그렇게 듣기 싫어했던 말인데. 내 입에서 똑같은 말이 나오다니.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너까지 얹지 마라."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엄마는 마치 어디론가 푹 꺼져버릴 것 같은 힘없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러면 입을 닫았다. 내가 한 마디 더 보태면 엄마는 그렇게 무너져 버릴 것 같아서. 나도 엄마가 그렇게 말을 하면 요구를 철회하고, 엄마랑 같이 놀기를 포기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마음은 좋지 않았다. 엄마는 나랑 있는 게 힘든가. 내가 그렇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나. 싶어서. 아마 지금 큰 애의 저 눈망울에 담긴 표정도 아마 그런 뜻일 거다. 


나는 커서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아이를 낳으면 힘들어도 꼭 놀아주고 서운하지 않게 해 줘야지. 했는데 웬걸. 엄마가 그동안 너무 대단하게 해오셨던 거였다. 난 엄마처럼 시어머니를 모시지도 않고. 가사도 신랑이 많이 하고. 이모님도 계신데 이렇게 힘든데. 엄마는 대체 우리를 어떻게 길러오신 거지? 엄마는 그 에너지가 다 어디서 났던 거지?


한 10분, 에너지를 충전한 후 전투기를 집어 들었다. 

"크와앙. 큰 전투기 어디 갔냐. 용서하지 않겠다."

"이번엔 내가 꼭 이길 거야, 해봐."

"이번엔 내가 꼭 이길 거야! 왕미사일을 맞을 준비를 해라. 크하하."


놀아줄 에너지를 모아 온 나를 보며 큰애가 눈을 반짝인다. 대사도 코칭을 해준다. 큰 애를 이겨서도 안 되지만, 대충 싸우다가 져서도 안된다. 그야말로 졌. 잘. 싸. 가 필요하다. 사장님과 축구시합을 할 때처럼,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처럼 연기하며, 최후에 안타깝개 패배해야 한다.  


그렇게 첫째랑 놀아주는데 둘째가 서운한 눈망울로 나를 쳐다본다. 손에 이미 로봇으로 변신한 자동차를 들고 있다(혼자 할 수 있으면서 왜 시키는 거야!). 네 살인데 엄마보다 장난감 조립 능력이 뛰어나다. 투둥퉁퉁. 입으로 전투기 효과음을 내며 큰애를 공격하러 간다. 도망치는 큰애를 한 손으로 잡으며, 다른 손으로 둘째의 조그맣고 귀여운 머리통을 쓰다듬어본다. 알아. 너도 보고 있어. 엄마도 둘째였고. 네 심정 다 알아. 그냥 지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놀아주는 게 정답인지 모를 뿐이야. 그리고 너무 피곤할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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