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티라노 Jun 25. 2022

엄마가 되어 엄마를 보다

감사하고, 죄송하고, 존경스러운. 그래서 눈물이 나는.

엄마는 74학번이다. 명문여고를 졸업했고, SKY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던 재원이었다. 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고, 두뇌도 명석했으나, 학창 시절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꽤 고생을 했다고 하셨다. 외할아버지께서 참 순진하게도 지인의 채무에 대한 보증을 서셨고, 그 지인은 거액의 채무를 남겨놓고 잠적했다. 채권자들은 당연하게도 외갓집으로 들이닥쳤다. 그 당시 열정을 가지고 배우던 바이올린에 빨간 차압 딱지가 앉던 순간을  기억한다고, 엄마는 말했었다. 


당시 명문여고는 매우 부유하거나, 상당히 부유한 소녀들이 다니던 곳이었던 모양이다.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노동현장에 내몰리지 않을 여유가 있었던 집안의 소녀들이 모이는 곳이었으니까. (요새도 가끔 엄마가 고등학교 동창회에 다녀와서 친구분들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부유한 분들이다. 강남에 부동산이 몇 채씩 있고, 기사님들이 사모님을 태우고 오고, 모시러 오고, 남편의 이름이 신문에 오르내리는 그런 분들이다)


엄마는 명문여고에 다니는 소녀들 중에는 가난한 축에 속했다. 그래도 한결같은 성실함,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태도 덕분인지 늘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엄마는 장학금을 받으며 SKY에 입학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사립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순박한 시골 남자와 결혼을 했다. 




순박한 남자. 큰 성공을 꿈꾸지도 않고, 돈과 명예를 지상 최고의 가치로 떠받들지도 않고, 다른 여자에게 한 눈 팔지도 않고. 내 아내의 말이라면 일단 맞다고 생각하고 들어주는 남자. 엄마가 결혼을 고민하던 70년대 후반에 그런 남자는 희귀했다. 엄마는 자아가 강한 편이었고, 그런 엄마를 받아들여주는 그 순박한 남자를 선택했다. 그 남자 자체는 좋았다. (좀 센스가 없기는 했지만) 엄마를 존경했고, 엄마의 의견을 경청했고, 애교가 많았다. 아이들과 잘 놀아주고, 사랑을 쏟아주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엄마는 결혼하면서 각오했던 것 보더 더 큰 역경을 지나와야 했다. 순박한 남자는 그 남자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시댁'. 그게 그렇게 큰 무게를 지니는 줄 알았더라면, 엄마는 그 시댁의 큰아들과 결혼하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봤을지도 모르겠다. "엄마, 엄마는 다시 태어나도 아빠랑 결혼할 거야?"라고 순진하게 물었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는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빠만 생각하면, 다시 결혼할 거야."라고. 나는 굳이 "다른 것도 다 고려한다면?"이라고는 묻지 않았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세끼 밥을 챙겨야 하는 삶이었다. 제사 때마다 혼자 20명분의 음식을 마련하면서도, 그럼에도 빠진 음식이 있으면 타박을 받는, 그런 삶. 엄마 본인은 살림에 보탠다고 다이아몬드 반지는 하지 말자고 제안했는데, 10년도 더 전에 결혼한 시누이가 나타나 엄마에게 자신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해내라고 요구하는 시댁이었다. 가끔 작은아버지가 엄마에게 큰돈을 빌려가고, 막내 고모가 우리 집에 근저당권을 설정하기도 하는 삶이었다. 장학금을 받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SKY를 졸업했음에도, "치약을 이렇게 중간부터 짜면 어떡해. 대체 친정에서 뭘 배운 거야?" 라거나 "발뒤꿈치 좀 들고 걷지 못해? 장판 다 무너지겠다"라는 소리를 듣는 삶. 엄마는 꽤 오랜 시간을 참았다. 어린 오빠와 내가 앉아있는 밥상에서 할머니가 "이걸 시어머니 먹으라고 내놓는 거야? 안 먹어!"라고 수저를 내동댕이 쳤을 때까지는.


엄마는 할머니가 던진 수저를 집어 올리고는 차분히 말했다. "저는 최선을 다해서 차렸는데, 마음에 드시지 않는다니 유감이네요. 제가 억지로 드시게 만들 수는 없으니, 드시지 마세요." 이후 할머니는 식사시간에 식탁으로 나오지 않으셨다. 엄마는 소반에 밥, 국, 반찬 세 가지(또는 네 가지)를 담아 나에게 내밀었다. "할머니 방에 식사 드리고 와." 그렇게 공간이 분리되었다. 소반 위의 그릇에는 음식이 참 정갈하게도 담겨있었다. 국물이라도 한 방울 떨어지면, 엄마는 그 얼룩을 키친타월로 깨끗이 닦아냈다. 나는 그게 엄마 방식의 시위라고 생각했다. "저는 도리를 했어요."라고 말하는 듯한 정갈한 상차림이었다. 



엄마는 흠잡히지 않게 살림을 하면서, 때론 학원 강의를 나갔고, 때로는 과외를 했다. 한글이나 영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어머니들께 강의 봉사를 하기도 했다. 나는 아직 어린 초등학생인 나를 두고 자꾸 나가려고 하는 엄마가 당시에는 이해되지 않았다. 


"엄마는 나랑 있는 게 싫어? 왜 강의 봉사를 하러 나가? 돈 벌려고 나가는 것도 아니잖아. 나 내 손으로 열쇠 따고 집에 들어오는 거 싫어. 엄마가 집에서 '어서 와' 해주면 좋겠어."


엄마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해심 많은 네가 이해 좀 해줘. 좋은 일 하러 거잖아.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는 일이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게 엄마의 '숨 쉴 구멍'이 아니었던가 싶다. 내가 미웠던 것은 아니지만. 엄마를 어디론가로 끌어내리고, 엄마를 어딘가에 묶어놓는 우리 집으로부터 잠시 분리되고 싶었던 순간들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그 심정이 너무도 이해가 간다. (나는 엄마보다 객관적으로 훨씬 난이도 낮은 삶을 살고 있음에도, 지금 이렇게 자란다 선생님을 초청해놓고 글을 쓰러 나오지 않았던가!)


엄마는 엄마의 30-40대를 '어둡고 긴 터널'이라고 표현했다. "어차피 앞이 보이지 않으니 다음 발을 내디딜 곳 한 치 앞만 바라보고, 걷고 또 걷는 시간들이었어"라고. 엄마를 붙잡아준 건 엄마의 내면의 강인함이었다. "내가 선택한 삶이니, 잘 살아낼 거야. 틀린 선택을 했다고 후회하는 결말이 되지 않도록 내가 만들 거야."라는 마음으로 버텼다고 했다. 


내가 기저귀를 뗄 때까지 엄마는 천기저귀를 삶고 풀을 먹였다. 강의를 나가는 동안에도 매일 반찬을 바꾸어주었고,  아빠가 다음 날 입고 나갈 정장과 셔츠를 줄 잡아 다려 넥타이까지 매칭해 걸어두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밥 세끼 한번 거르지 않고 챙겼다. 나로서는 상상만 해도 아찔한 가혹한 가사노동의 현장에서 엄마는 멋지게 해냈고, 살아남았다. 하얗고 가늘었던 엄마의 손마디는 불거져 올라왔고, 너무 오래 지나치게 성실하게 살았던 탓인지, 불면증으로 고생하시지만. 여기까지, 우리 가정을 엄마가 하드 캐리 해서 끌고 온 것을 우리 가족과 친지 중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그게 쉬웠다고 말하지 않는다. 몇 년 전 작은아버지께서 암으로 돌아가실 때도, 그 누구도 아닌 엄마에게 가장 의지를 많이 하셨다. "형수님의 LA갈비가 너무 먹고 싶어요. 명절마다 그거 먹을 생각에 신났었는데.."라고 하셨더랬다. 



나는 엄마를 보면서, 생각했었다. 시댁까지 다 따져봐서 답이 나오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아빠보다 더 가정적인 남자를, 엄마의 시댁보다 더 이해심 많은 시댁을 택했다. 그리고 내가 결혼하고 살아가는 이 시대는 엄마가 워킹맘으로 살아온 그 시대보다 여러모로 나으니, 아이를 낳아도 어떻게는 살아지리라. 내가 목격한 엄마의 삶보다는 쉬울 것이라, 그리 예상했었다. 


과연. 그보다는 쉬웠다. 문제는 엄마의 삶보다 한참 더 쉬운, 나의 육아, 나의 살림만으로도 나에게는 XX게 힘들다는 것. 이 일상을 보내며 생각한다. "엄마, 진짜로 리스팩트해. 엄마는 내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어려움과 막막함 속에서 나를 키웠구나." 내가 더 잘해야겠다. 가끔 오빠를 더 위해주는 것 같은 모습에 내가 참 못나게도 삐질 때가 있는데. 그런 순간에도 엄마는 내 안에서는 어마어마한 거인이다. 

작가의 이전글 올해도 반이나 지나갔는데, 그동안 대체 뭐했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