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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라노 Jun 18. 2022

올해도 반이나 지나갔는데, 그동안 대체 뭐했나?

내 안에 악덕 상사가 산다. 

내 안에는 "김 상무"라는 모시기 힘든 상사가 산다. 그는 기준이 높고, 까다로우며, 칭찬을 해주기보다는 질책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뿐인가. 그가 팀원에게 할당하는 목표는 추상적이고, 그는 팀원들이 그 목표를 향해 잘 가고 있는지 방향성 점검도, 중간과정 관리도 해주지 않는다. 그러다 이따금씩, 분기별, 반기별로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아니, 벌써 2022년도 반이나 지나갔잖아. 잘하고 있는 거 맞아?" 하고 소리친다. "올해 목표 뭘로 정했어? 연간 KPI 가져와봐. 달성률도 정리해서 원페이지로."


한편 내 안에는 김 과장도 산다. 대외적으로는 성실한 이미지지만, 은근히 뺀질대고 게으름 피우는 것을 좋아한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쩍 곤경을 모면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래도 크게 사고 치거나, 업무를 빼먹는 건 아니어서, 실무자로서 나름 괜찮은 사람이다. 그는 김 상무를 오래 모셨기에 반기마다 찾아오는 그의 질책 또한 이미 예상했다. '또 시작이네. 이번 보고만 지나가면 또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관심도 없을 텐데, 적당히 보고 잘하고 넘어가야겠다.' 속으로 생각한 김 과장은 지난 6개월의 삶을 돌아본다. '뭐, 솔직히 평타 이상이지. 더 잘하길 바랐으면 임원이 목표 설정도 더 잘해주고. 과정 관리도 해줘야지. 그래야 맞지.'


김 과장은 김상무에게 보고서를 자신 있게 들이밀었다. "지난 6개월의 삶에 대해 보고 드립니다. 베스트라고는 못해도. 솔직히 괜찮게 했습니다. 먼저 [일/직업] 영역입니다. 회사생활도 성실히 했고, 꽤 잘하고 있다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글도 꾸준히 썼고, 강의 봉사도 잘했다는 외부평가받았습니다. 앙코르 요청도 받았거든요. 그다음은 [가족] 영역입니다. 남편이 석사학위 시작해서 육아 공백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꽤 잘 적응했습니다. 부천 플레이 아쿠아리움도 데려가고, 과학관도 혼자 데려가 보고, 63 빌딩도 가봤습니다. 아, 큰 아이 치과랑 성장클리닉도 때에 맞게 잘 데려갔죠. 앞으로 남은 6개월도 잘해보겠습니다. 다음은 [건강] 영역인데, 필라테스 꾸준히 했고, 영앙제 챙겨 먹었고, 천식 증상도 잘 관리 중입니다." 김 과장은 칭찬은 아니더라도, 무던히 넘어갈 것을 기대하며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김상무를 바라보았다. 


보고서를 가만히 바라보던 김 상무의 얼굴이 서서히 구겨졌다. "이게 다야?" 김 과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하다는 눈으로 김 상무를 바라보았다. "네?" 김상무가 화를 참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성과라고 할 만한 게 없잖아. 그냥 일상적인 업무는 빼먹지 않고 했다. 그거 아냐? 집도 장만 못했어, 시드머니 충분히 모은 것도 아니야, 몸무게도 그대로고, 나이만 먹었잖아! 지금 이 방향으로 가는 게 맞아? 인생의 방향성에 대한 진지한 점검이 빠졌잖아!" 김 과장이 뭔가 대답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닫았다. "김 과장, 뭐, 할 말 있어? 할 말 있냐고." 김 과장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지금 말씀하신 것들은 올해 목표(KPI)에 반영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상무님도 지금 말씀하신 목표를 이루도록, 어떤 가이드도 주신 적이 없고요." 김상무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섰다. "넌 꼭 말을 해야 하냐? 알아서 잘해야지, 알아서 잘." 


이쯤 되면 김 과장이 멘탈 데미지를 좀 입었겠다, 싶을 수도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한두 번 겪어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하반기 KPI에 지금 말씀하신 것들을 반영할까요? 그럼 무리도 좀 해야 할 것 같고, 무리한 만큼 충분한 보상이 주어져야 할 것 같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목표인 만큼 상무님께서 밀착해서 지시를 좀 주시거나, 전문가 붙여주시거나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김상무가 좀 움찔했다. 실무자를 쪼고 싶긴 했지만, 실무자를 쪼기 위해서 본인이 부지런히 발로 뛸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아 거 좀, 현명하게 하자, 현명하게." 김 과장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한발 물러서겠다는 것이고, 적당히 지금처럼 일상 업무만 잘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겠다 싶었다. "네." 말투만은 더없이 공손했다. 


김 과장은 다음 날에도 일상의 소중함을 만끽하며, 자신의 눈앞에 주어지는 일/가족/건강의 과제들을 성실히 해결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상무가 그를 다시 찾았다. 하반기 목표를 좀 수정하면 좋겠다고 하면서. 과연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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