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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라노 Jun 04. 2022

그들은 왜 극단적 선택을 했을까?

아까운 죽음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서글프다

9년  전 어느 날이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 날씨는 맑고, 하늘은 파랗고, 나는 피곤하고, 할 일은 많았던 여느 보통날이었다. 직장 동료 중 한 명이 다른 부서 직원 한 명이 회사에서 투신자살을 했다더라, 하고 소문을 전해줬다. 회사에서 투신한 것을 보니, 자살의 이유가 회사에 있는 것 같다, 그런 추측을 덧붙였다. 누군가는 끝을 알 수 없는 야근이, 누군가는 지나친 성과 압박이 원인인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았다고 한다. (사실인지 여부는 검증해 보지는 못했다.)


"왜 죽었대. 힘들면 그냥 때려치우지." 

멀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던진 말이 귀에 날아들었다. 일견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도 무심한 말이었다. 우리는 모르니까. 그 사람이 어떤 불행을 지나고 있었는지. 왜 그냥 일을 그만둔다거나, 그를 괴롭히는 것에서 도망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었는지. 


한 달 전쯤에는 젊은 검사 한분이 투신으로 삶을 마감했다는 뉴스를 읽었다. 장래가 촉망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맡은 사건에 대한 사명감도 투철했다고 건너 들었다. 왜 그랬을까. 왜 투신으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을까. 안타깝고 아까운 죽음에 괜스레 마음이 헛헛하였다. 




자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는 확실히 죽음에 대한 상상을 자주 했다. 꽃이 피는 봄이면, 백합꽃을 방안에 가득 채우고 자면 죽을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고. 여름이면, 문을 닫고 선풍기를 켜 둔 채 잠이 들면 죽을 수 있다는 말을 곱씹었다.(사실무근의 낭설이었다. 당연하게도) 가을에는 가을을 타는 바람에 우울해서, 겨울에는 얼어붙은 흙과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무를 바라보니 인생이 무상해서, 손목의 동맥을 끊어내고 잠깐의 고통으로 삶을 마감하는 상상을 했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왜 굳이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없애버리고 싶었을까. 그리 빼어나다, 대단하다 할 것은 없지만, 적극적으로 미워하거나 혐오할 구석도 별로 없는 평범한 소녀였는데. 그냥 좀 얌전하고, 재미없는 모범생 중 하나였을 뿐인데. 그때는 내가 지독히 싫었다. 도저히 사랑할 수가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가하는 폭력을 참아내야 했던 시기여서 그랬던 것 같다. 한창 집에서 많이 맞았을 때. 학교에서 짧겠지만 따돌림을 당했을 때.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가하는 폭력이나 부당한 대우로부터 나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했을 때. 스스로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괜찮지 않았을 때. 그때 나는 나를 그냥 놓아버리고 싶었다. 


사람은 왜 스스로를 지워내려고 하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들의 죽음이 타인의 폭력(형태를 불문하고)에 기인한 것이라면, 그 폭력에서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한 무력감에 터 잡은 것이라면, 그렇다면 너무 아깝고, 서글플 것 같다. 


당신은 그래서 평안에 도달했나요? 그랬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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