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운 죽음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서글프다
"왜 죽었대. 힘들면 그냥 때려치우지."
멀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던진 말이 귀에 날아들었다. 일견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도 무심한 말이었다. 우리는 모르니까. 그 사람이 어떤 불행을 지나고 있었는지. 왜 그냥 일을 그만둔다거나, 그를 괴롭히는 것에서 도망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었는지.
자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는 확실히 죽음에 대한 상상을 자주 했다. 꽃이 피는 봄이면, 백합꽃을 방안에 가득 채우고 자면 죽을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고. 여름이면, 문을 닫고 선풍기를 켜 둔 채 잠이 들면 죽을 수 있다는 말을 곱씹었다.(사실무근의 낭설이었다. 당연하게도) 가을에는 가을을 타는 바람에 우울해서, 겨울에는 얼어붙은 흙과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무를 바라보니 인생이 무상해서, 손목의 동맥을 끊어내고 잠깐의 고통으로 삶을 마감하는 상상을 했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왜 굳이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없애버리고 싶었을까. 그리 빼어나다, 대단하다 할 것은 없지만, 적극적으로 미워하거나 혐오할 구석도 별로 없는 평범한 소녀였는데. 그냥 좀 얌전하고, 재미없는 모범생 중 하나였을 뿐인데. 그때는 내가 지독히 싫었다. 도저히 사랑할 수가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가하는 폭력을 참아내야 했던 시기여서 그랬던 것 같다. 한창 집에서 많이 맞았을 때. 학교에서 짧겠지만 따돌림을 당했을 때.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가하는 폭력이나 부당한 대우로부터 나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했을 때. 스스로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괜찮지 않았을 때. 그때 나는 나를 그냥 놓아버리고 싶었다.
사람은 왜 스스로를 지워내려고 하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들의 죽음이 타인의 폭력(형태를 불문하고)에 기인한 것이라면, 그 폭력에서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한 무력감에 터 잡은 것이라면, 그렇다면 너무 아깝고, 서글플 것 같다.
당신은 그래서 평안에 도달했나요? 그랬기를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