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을 하려면 안전지대를 벗어나야 한다.
사부는 제자들에게 평소에 자기를 점검해 볼 수 있도록 basic check list를 주었는데, 그중 한 가지가 "어떤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가"였다. 이 글은 성장을 위해 매일 새로운(조금은 무모한) 도전을 해야 한다는 사부의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나 자신 만의 안전지대(safety zone)가 있다. 내 경우엔 가족, 친밀한 주변 사람들, 우리 동네, 회사, 그리고 내가 해왔던 업무 등이 나의 안전지대다. 그 안에서 평소의 편안하고 안정적인 기분을 만끽하던 중, 오랜만에 사부와 M2 가족들과 함께한 강연에서 사부는 "스스로 생각할 때 조금은 무모하다고 생각되는 도전을 하고 있나요?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성장하고 있지 않은 겁니다"라고 말했다.
모두에게 들으라고 말해준 것이지만, 나는 마치 나에게 강조해서 얘기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가정을 꾸렸고, 자녀가 태어났기 때문에 지금은 새로운 도전을 할 시기는 아니지 않은가 생각하며 잠시 성장하는 것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 있었던 터라 찔렸던 것 같다. 꼬박고박 월급도 주는 회사(거기다 팀원들도 다 좋은 사람들이다!)에 감사하며 타성에 젖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대로도 좋아'라며 빈둥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더 레벨이 높은 시련이 다가올 것은 명약관화하다. 경력관리와 육아를 병행해야 하고, 내가 정말 인생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에 대한 구체적인 답도 찾아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이전까지 보다는 더 난이도가 있는 과업이고, 나에게 지금 당장 대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아직 나는 이 모든 걸 쉽게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실력이 뛰어나지 않다. 따라서 지금 레벨업을 재개해야 한다.
"레벨업 해야 한다. 지금 새로운 도전을 뭐라도 해봐야 해"라고 마음은 매일 같이 새로 고쳐 먹는데도, 좀처럼 시작을 하기가 어렵다. 한 번 시작하면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에 마음속에 묘한 저항감이 있다. 그것도 아주 교묘하게 저항한다. "아예 안 하겠다는 게 아니잖아, 내일(또는 다음에) 하자고."라고. 하지만 그러다 보면 영원히 레벨업을 할 수 없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레벨업을 하겠다는 욕망보다 그냥 안주하고 싶은, 잠깐만 쉬고 싶은 욕망의 강도가 진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전지대 밖으로 한 발씩 내놓는 훈련이 필요하다.
안전지대 안에 있으면 편하다. 와우에서도 내 레벨보다 내가 속한 지역의 레벨이 낮으면 몬스터나 적군의 공격에 죽을 일이 없다. 당연히 마음도 편안하다. 그런데 내 레벨보다 더 낮은 레벨의 지역에 계속 머무르면 레벨업을 할 수 없다. 레벨업을 하려면 힘들더라도, 무섭더라도 안전지대 밖으로 나가야 한다. <크로스로드>에서 퀘스트를 다 마치고, 주변 몬스터들도 나보다 레벨이 더 낮아졌다면, <타우라조 야영지>로, 그 후엔 <해바위 야영지>로, <높새바람 봉우리>로, <잿빛 골짜기로>로, 계속 나보다 레벨이 높은 지역을 찾아가야 경험치를 얻을 수 있고, 그때야 비로소 레벨업을 할 수 있다. 내 레벨보다 더 높은 레벨의 지역으로 처음 이동할 때는 두렵다. 갖가지 어려움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보다 센 몬스터를 두 마리 이상 만나면 높은 확률로 사망해서 무덤에 다녀와야 하고, 퀘스트 내용도 어렵다. 지역도 익숙하지 않아 길을 잃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 지역에서 퀘스트를 다 깰 때쯤이면, 나는 어느새 레벨업이 되어 있다. 그 지역을 들어올 때 처음 만났던 몬스터 같은 건, 나를 쫄게 했던 잿빛 늑대 같은 건 한두 번의 공격으로 쓰러뜨릴 수 있게 된다.
얼마 전 방영한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하 "알쓸신잡") 2: 목포편> 에서 뇌과학자 장박사도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더 멋진 표현으로 더 섬세하게 표현했다(뇌과학 분야에서도 알아주는 석학이 이런 문학적 표현까지 잘한다니, 사기 캐릭터인 것 같다). 사람이 성장하는 때는 단단한 껍질을 내려놓고 연한 속살을 환경에 노출시키는 리스크를 감당할 때라는 것. 정말 약해져 있고, 스치기만 해도 상처받을 것 같을 때 우리는 성장한다는 것. 원문에 가깝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갑각류는 껍데기가 있어서 겉이 딱딱한 생물인데, 그 갑각류가 성장을 하려면 탈피를 해야 돼요. 탈피한 직후의 갑각류는 아주 약해요. 하지만 갑각류가 성장하는 때는 오직 가장 약해져 있는 바로 그 순간이에요.
인간의 몸은 척추동물이지만 마음은 갑각류가 아닌가 싶어요. 사람도 마찬가지로 성장하는 순간은 가장 약해져 있고 상처받을 수 있는 순간인 것 같아요. 상처받지 않는 단단한 마음의 껍질도 좋지만, 죽을 것 같고 스치기만 해도 상처받을 수 있는 그 순간이 바로 우리가 성장하는 순간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안전지대에서는 어떻게 나오면 될까? ①먼저 내가 원하는 삶과 현실의 나를 살펴본다. 그리고 ②내가 원하는 삶을 살려면, 내가 어떤 능력을 더 길러야 하는지, 어떤 것을 추가적으로 갖추어야 하는지 본다. 그리고 ③내가 원하는 삶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그런 과업을 주는 곳으로 가면 된다.
내 경우엔 이직이었다. 당시 내가 다니고 있던 첫 직장은 좋은 곳이었다. 일단 네임벨류가 있었고, 팀장님, 팀원들도 좋은 사람들이었다. 적지 않은 월급을 매달 늦지 않게 주었을 뿐 아니라, 집 앞에서 회사까지 가는 셔틀, 하루 3끼씩 매끼마다 다이어트 식단을 포함해 10가지 이상의 다양한 메뉴를 제공해 주던 곳이었다. 무엇보다 회사차원에서 모성보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 출산(산전후)휴가, 육아휴직을 자유롭게 쓸 소 있고 그로 인해 인사상 불이익이 없도록 관리해 주는 곳이었다. 매우 달콤한 안전지대였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는 없었고, 앞으로 어떻게 성장해 나가겠다는 경력 로드맵을 그릴 수가 없었다. 내 일상은 편안했지만, 레벨업을 원하던 상태였다.
그래서 다른 회사에 지원했다. 주변에서는 반대가 심했다. 왜 굳이 더 어렵고, 왜 더 보장되지 않은 길을 가려고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내심 나도 무서웠다. 옮기려는 회사가 과연 내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하지도 못했던 어려움이 있지는 않을까? 다니던 회사에서처럼 좋은 사람들을 만나 같이 일할 수 있을까? 연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업무강도는 더 높을 게 뻔하고, 아직 체계도 덜 잡힌 것처럼 보이는 회사로 옮기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 확신이 잘 서지 않았었다. 들어가는 과정도 힘들었다. 일정이 촉박해 자기소개서를 하루 만에 써서 내야 했고, 경력직에게도 수학 문제를 포함한 인적성검사도 요구했고, 직급 인정 관련해서도 협상을 해야 했다. 입사 후에는 1년 반 동안은 4시 50분에 기상해서 밤 10시가 넘어 귀가하는 일정을 소화해야 했고, 그 전엔 해보지 않던 금융, M&A 딜에 참여했고, 퇴직금, 추심금, 물품대금 반환, 부동산 소송 및 집행도 동시에 진행했다. 처음 하는 업무를 할 때마다 촉각이 곤두섰다.
어느새 회사를 옮긴 지 2년째, 언제 불안했었는지 기억도 잘 안 날 정도다. 처음엔 불안했던 새 직장에서의 삶도 어느새 익숙해졌고, 그 2년이라는 기간을 견디면서 내 레벨도 분명히 올라간 것이 느껴진다. 막연히 고민만 해보던 서면 쓰기, 변론하기, 로펌 컨트롤하기 등을 실제로 해본 것만으로도 경험치라는 자산이 쌓이고, 내가 능히 해낼 수 있는 것과 좀 더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의 목록 등의 데이터도 구체적으로 확보하게 되었다. 좀 규모가 큰 도전이었고, 감당해야 하는 리스크도 분명히 있었지만 레벨업의 측면에서는 분명 성공적이었다.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것이 이직 같은 극단적인 것일 필요는 없다. 안전지대를 과감하게 벗어날수록 과감한 레벨업이 가능하지만, 레벨업 당시 겪어야 할 시련도, 감당해야 할 리스크의 스케일도 커지기 때문이다. 15레벨에서 바로 20랩~25랩 지역으로 가기보다는 14랩~20랩 지역을 거쳐 가는 것이 보다 안전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M2 핵심 멤버 중 한 분은 전통 클래식 음악을 하던 첼리스트셨지만, 얼마 전 조금 달리하여 CCM 음악 연주 앨범을 내셨다. 첼로 연주, 음반 작업 등 본인이 친숙한 분야에서 장르만 변경하였기 때문에 리스크가 크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음반이라는 자신만의 포트폴리오를 구축할 수 있었으므로 비교적 안전하게 레벨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본업인 법무업무와는 아직 큰 상관이 없지만, 부족하나마 멘토링 노트와 그 밖에 생각나는 콘텐츠를 묶어 책으로 낼 생각이다. 글을 쓰는 일은 나에게 있어 친숙하고, 앞으로 법무와도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일이니 리스크가 적다. 하지만 자기계발 관련 콘텐츠에 대해서는 사부만큼 알지 못하고, 관련 분야의 책을 써본 적도, 멘티를 길러본 적도 없으니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든다. 서툴고 영향력 없는 자신을 마주해야 하고, 그 과정이 즐겁지 만은 않다. 아직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지 않으니, 아마 자비를 들여 출판해야 할 것 같은데 이 또한 금전적인 리스크이다. 하지만 감당하고 안전지대 밖으로 한 걸음 나가볼 예정이다. 한번 나간 후에야 비로소 레벨업을 할 수 있으니까. 한 끝 차이지만, 유의미한 차이다. 그 차이들을 만들어내는 걸 계속했을 때에야 비로소, 만랩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