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게임 룰 열다섯:

분노하면 지는 것이다.

by 티라노

분노는 나의 힘?


한때 나를 지배하고 있던 대부분의 감정이 분노인 적이 있었다. 기형도 시인의 시,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제목의 형식을 빌려와 <분노는 나의 힘>이라는 조각 글들을 써서 모아둘까 생각했던 적이 있을 정도다. 사부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사부의 다른 제자인 도도리님과, 사부의 지인 웅이 아저씨와 함께 보컬 레슨이 끝나고 스타벅스에 갔는데, 사부가 연애에 대한 본인의 이론을 펴는 것이었다. 도도리님께 조언을 해주던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냥 들어두고 참고하면 좋을 말들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무례하게 말꼬리를 챘다. "꼭 그런 건 아닌데요. 너무 일반화하시는 거 아닌가요? 예외도 많아요." 사부는 엷은 미소를 띠며,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내가 말한 취지에는 너도 공감하지 않아?" 하고 내 가시 돋친 말들을 옆으로 슬쩍 흘렸다. 그다음에 사부를 만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사부가 문득 말했다. 열한 번째 딸내미를 하라고. 아빠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좋지만, 나는 너를 딸로 생각하고 아껴주겠다고. 아마도 사부는 분노에 휩싸여 매사를 다 시뻘건 눈으로 보던 당시 내 상태를 보고 날 안타깝게 여겨준 건 아닐까 생각한다. <십이국기>에서 타지인으로 몇 번이나 배신당하고 죽어가던 요코를 발견한 라크슌처럼 말이다.


십이국기5화.PNG <십이국기 5화>



감정의 요요현상: 당신 감정의 디폴트 값은?


내 감정의 디폴트 값은 분노였다. 나는 남이 보기에 만만한 사람이었다. 왜소하고, 힘도 없고, 내성적이었다. 그런데 성격 만은 고분고분하질 못했다. 그래서였는지 어렸을 때 누군가의 분풀이로 샌드백이 되어 많이 맞았다. 맞서 싸울 힘이, 이겨서 무릎 꿇게 할 힘이 없는 게 굴욕적이고 수치스러웠다. '내가 약해서 맞는 거야, 두고 봐, 잊지 않고 다 기억해 두었다가 두배로, 세배로 갚아줄 거니까.' '강해지면 해결될 일이야. 그때 돼서 보자. 절대로 봐주지 않을 테니까.' 주로 이런 마음을 품고 10대를 보냈다. 대학교에 입학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행복해 지기에 필요한 어떤 능력이나 스킬이 없어서, 또는 좋은 자질과 특성을 타고나지 못해서 행복하지 못한 줄 알았다. 근데 사부와 얘기를 하다 보니 알게 되었다. 내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그 사람들을 미워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들을 용서하고 내 마음속으로부터 내보내 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부는 이걸 데이비드 홉킨스의 <의식혁명>에 나온 내용을 끌어와 설명해 주었다. 내가 잡고 있었던 감정은 분노, 굴욕, 수치심이다. 이것은 부정적인 방향이다. 이 상태에서 내가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은 부정적인 감정뿐이다. 분노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통찰력을 갖고, 기쁨을 느낄 수는 없다. 때문에 내 삶의 다른 영역에 대한 부분도 탈이 나는 것이었다. 내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 내가 가진 작은 것도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집착, 그리고 무기력으로.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만날 기력이 없어서 와우를 하루에 16시간씩 했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사부는 내가 힘들고 상처받았던 기억을 얘기하면 잘 들어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를 상처 줬던 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고,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 그래야 한다고.


처음엔 거부반응이 생겼다. 용서만 생각해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억울하잖아요, 이대로 끝내라니. 잘 못한 사람은 내가 아닌데. 제대로 된 사과나 보상도 받지 못했는데. 이대로 그냥 끝내라고요?" "어차피 사과나 보상은 없어. 그건 강제할 수 없잖아. 남은 문제는 네가 계속 분노와 미움을 잡고 있을 것인지, 놓아줄 것인지의 문제만 있을 뿐이야." "그만 그 감정을 놓아줘. 그래도 너는 괜찮을 거야. 내가 여기 있잖아." 사부가 이렇게까지 잡아줬지만 내 마음을 놓기까지는 약 3년이나 걸렸다. 그런데 놓고 나니 보였다. 내 삶의 다른 영역에 있는 문제들도 풀렸다. 다른 사람을 그냥 나 혼자 용서했을 뿐인데, 내가 보는 내 모습도 예전보다 더 나아졌다. 2016년 2월에 샌프란시스코에 친한 부부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Will과 Erin은 "얼굴이 좋아졌어. 편안해 보여. 위태위태해 보였는데."하고 내 변화를 알아채 주었다. 내 의식에도 작지만 의미가 남다른 의식의 혁명이 있었던 셈이다.


의식의지도.PNG http://wkhanbang.tistory.com/576


뇌는 유쾌하고 행복한 감정이라고 해서 더 좋아하지 않는다. 유쾌한 감정이건 불쾌한 감정이건 익숙한 감정을 선호한다. 불안하고 불쾌한 감정일지라도 그것이 익숙하다면 뇌는 그것을 느낄 때 안심한다.

<감정은 습관이다> 박용철 저, http://blog.aladin.co.kr/759570118/popup/7842149




잊히지 않는 이름: 블루제이, 할머니


그렇다면 답은 명확하다. 분노를 놓고, 즐거운 감정, 긍정적인 감정을 잡아야 한다. 현재 나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이 부정적일수록, 나를 둘러싼 환경이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올 가능성이 클수록 의식적으로 긍정적인 감정을 잡아야 한다. 내가 한창 와우를 하던 때 나는 주로 <아즈샤라> 서버에서 <호드>를 했었다. <얼라이언스> 진영과는 적이니, 상대 진영의 플레이어를 만나서 싸우다가 죽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고 화가 나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두 번 진짜 화가 났던 적이 있었는데 한 번은 <버섯구름 봉우리>에서 <블루제이>라는 캐릭터를 만났을 때였고, 한 번은 <그룸골>에서 <할머니>라는 캐릭터를 만났을 때였다. 이미 충분히 랩업을 해서 <버섯구름 봉우리>나 <그룸골> 같은 쪼랩들이 랩업하는 곳에 올 필요가 없었는데도 굳이 내려와서 무자비하게 쪼랩들을 학살하고 갔다. 그럴 시간에 레벨을 더하거나 아이템을 모으거나 평판 관리를 하거나, 하다 못해 낚시라도 할 것이지 굳이 열심히 커보겠다고 열심히 퀘스트를 하고 있는 쪼랩들은 왜 죽이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무덤만 왔다 갔다 했더니 레벨업도 못했고, 살아난다 한들 레벨 차이가 많이 나서 이길 수도 없고 마음만 분함에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니까 게임하는 시간이 즐겁지 않았다. 그러니까 고랩의 뒷치기 같은 부당한 일이 있어도 분노를 잡으면 안 된다. 내 의식 수준을 떨어뜨려 나를 부정적인 감정 가운데 거하게 한다. 그럼 자기 자신도, 자기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과 주변 환경도 제대로 보일 리 없다. 그러니 이제는 블루제이와 할머니라는 캐릭터 이름을 잊어줘야 한다.



분노는 디버프다. 걸리면 신속히 제거할 것.


사부는 2015년 독서클럽 시간에 요새 나를 정말 화나게 했던 것 3가지를 적으라고 했었다. 작년에 다시 바인더를 읽어보니 별거 아닌 일이었다. 1번으로 적어둔 내용을 보면 이렇다. 회사에서 내가 다른 사업부로 보직변경 신청(Job Posting)을 했는데 인사 담당자가 그걸 쪼르르 옆 부서 과장에게 말했고, 그 과장이 "나에게 여기 있으면 다 똑같이 B급이야. 너 혼자 잘난 줄 알아? 넌 거기다 여자인데 왜 일 욕심을 부려? 우리 와이프도 일 욕심이 많은데 그거 다 자기 힘들게 하는 거야. 아이 낳고 거기서 행복을 찾아, 그게 최고야."라고 충고를 해줬는데 당시에는 이 말이 주제넘고 무례한 조언이라고 생각해서 매우 화가 났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굳이 분노할 필요가 없었다. 내 미래에 대해 어떤 권한이나 영향력을 갖고 있지 않은 개인의 의견이기 때문에. 그래서 분노를 잡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감정도 습관이라고, 살다 보면 욱하고 분노가 올라올 만한, 짜증이 치솟는 일들도 많을 것이다. 이제는 그 감정을 잡지 않고 흘려보낼 것이다. 분노는 불시에 내 캐릭터에 걸리는 디버프다. 의식 레벨을 떨어뜨려 시야를 좁힌다. 이럴 때 무빙을 하면 이길 수 없다. 이기고 싶다면, 인생게임을 즐겁게 플레이하고 싶다면 디버프를 신속히 제거해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을 미워함으로써 내 영혼이 작아지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 부터 워싱턴




배경 이미지: 버섯구름 봉우리, 출처 http://fruitfruit.tistory.com/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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