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사라질 수 있는 거리
어떤 관계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라진다.
사과도 없었고,
서운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느 날부터 연락이 줄고,
약속은 미뤄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덜 궁금해진다.
그러다 보면
대화는 끊기고,
감정은 식고,
애써 붙잡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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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그게 이상했다.
뭐라도 말하고 끝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꺼림칙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모든 관계가 설명을 갖고 끝나는 건 아니라는 걸.
그저 흐려지다가,
서로의 이름이 입에서 덜 불려지다가
조용히,
그리고 충분히 멀어질 수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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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차갑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애써 따지지 않고 멀어지는 사이에는
나름의 정중함도 있다.
억지로 감정을 만들지 않고,
굳이 서운함을 던지지 않고,
싸우지 않고 떠나는 사람의 방식.
그걸 배웠다.
그리고 이제는,
그걸 이해한다.
⸻
나는 지금도 가끔
그렇게 멀어진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린다.
싫어진 건 아니지만,
이제 더 이상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들.
그 이름들을 떠올리면서도
굳이 다시 연락하지 않는다.
왜냐면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끝이 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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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관계가
항상 누군가의 잘못인 건 아니다.
그저 그만큼이었던 사이도 있는 거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런 거리를
억지로 되돌리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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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아도 사라질 수 있는 거리.
그건 외면이 아니라,
때로는
나를 지키기 위한
가장 조용한 정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