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는 스무 살 언저리에 땅끝마을로 시집을 왔다. 재취 자리였다. 첫 번째 부인이었던 노할머니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열 살은 어린 우리 할머니를 받아들였다. 그날로부터 어린 할머니는 주루룩 여섯 남매를 낳으셨다. 노할머니는 큰 삼촌을 유독 좋아하셨다. 꼭 여섯 남매 중에 큰 삼촌만은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그러셨다. 첫 아이여서일까, 장남이어서일까. 돌아가시는 날에도 큰 삼촌을 그렇게 찾으셨다고 한다. 우리 할머니는 꼭 노할머니에게 장남을 내어준 것 같았다. 마치 이 집에 들어와 제 할 일을 했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튼 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시간이 흘러 우리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건강하셨던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소식에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려갔다. 엄마는 단순히 조금 다치셨을 거라 생각하며 “니네 삼촌들이 이제서야 정신을 차리겠다”며 말을 바쁘게 했다. 며칠 전 꿈자리가 숭악해 할머니한테 가보라고 했던 나는 꽤나 불안했고,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중환자실 앞에서 할머니의 옷가지가 든 큰 비닐가방을 안아 들었다. 구급대원들이 대충 수습한 모양이었다. 그 비닐가방에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무연고. 신원 미상. 80대 추정.
화장터에서 우리 할머니는 한 줌의 가루도 되지 못한 채 놓여 있었다. 그것은 간신히 유골함에 쓸어 담아졌다. 그렇게 할머니가 사라졌다. 며칠이 지나고 엄마와 함께 할머니의 사망 신고를 하러 동사무소에 갔다. 행정적으로 우리의 관계를 ‘가족’이 아닌 ‘동거인’이라 했고, 사망 신고의 의무가 없다고 했다. 동거인이 사망 신고를 하기 위해 이런저런 서류를 떼다가 할머니의 호적을 보게 되었다. 할머니는 배우자도, 자식도 없었다. 사정상 우리 집으로 주소지를 해 두었으니 사실상 집도 없었던 건데, 심지어 나이마저도 몇 살은 더 어리게 신고되어 있었다.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잊고 있던 공책을 발견했다. 예전에 내가 할머니에게 이름 쓰는 법을 알려 주었던 연습장이었다. 나는 분명히 할머니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는데,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보다 자식들의 이름을 주루룩 써 두었다. 또 할머니는 틀니를 하셨는데, 틀니 세척제 폴리덴트 광고를 보고 한 번 사다 드렸던 적이 있다. 전화할 때마다 다 쓰면 얘기하라고 했는데, 할머니는 항상 많다고 했다. 참, 정말, 많이 남아있었다.
할머니가 살아 계셨던 어느 저녁이다. 그렇고 그런 저녁이 지나가고 있었다. 엄마는 여느 날처럼 일감을 가지고 집으로 왔고, 알바를 다녀온 나는 그것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뒤집거나 고무줄을 꿰거나 시다를 했다. 그러다 엄마에게 할머니 전화가 왔다. 낮에 왜 전화를 안 받았느냐며 쩌렁쩌렁한 할머니의 목소리로 시작된 통화에 엄마가 여태 일을 하고 있다며 꽤 애교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할머니는 돈 버는 일을 최고로 쳐주었다.) 엄마의 일을 거들던 내가 옆에서 할머니 보고 싶다며 쨍알거리자, 엄마가 전화를 바꿔 주었다. 누가 먼저 말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할머니 사랑한다고, 보고 싶다고 전했고, 수화기 너머로도 사랑한다는 말이 성큼 넘어왔다. 전화를 끊자 고개를 숙여 일을 하던 엄마가 그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우리 딸은 할머니한테 사랑한다는 말 다 들었네- 아마도 그날 밤을 엄마는 다 까먹었을 것이다.
'엄맘마, 빠빠빠'만 하는 우리 아기에게 엄마도 나도 우리 남편도 그렇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아주 나중에 아기가 너무 커 버려 사춘기가 와서 사랑한다는 말을 집안에서 들을 수 없게 될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지금부터라도 계속해서 말해야겠다. 버릇이 되게. 우리 딸이 사춘기가 돼도, 내가 갱년기가 돼도 그런 말이 어색하지 않도록. 엄마한테도 더 자주 말해야겠다. 엄마가 저절로 나한테 말할 수 있게,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