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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형 Aug 21. 2018

선풍기에서 시작된 이야기

올해 여름

올해 여름은 최악이었다. 갑자기 선선해진 날씨 때문에 어리둥절하고 다행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며칠 전만 해도 이 날씨 때문에 안타까운 사건 사고도 많았던 만큼 생각하기 싫은 끔찍한 더위였다. 내 인생 최악의 여름, 올해 여름이 그랬다.


함평에 계신 외할머니

함평은 우리 엄마의 고향이자 외할머니께서 혼자 살고 계신 곳이다. 우리 가족은 주말에 한번씩 할머니를 뵈러 함평에 간다. 올여름은 자주도 아닌 날에 가서 잠깐 엉덩이만 붙였다 나올때가 많았다. 푹푹 찌는 햇볕 아래 선풍기 두대가 전부인 시골 할머니 집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몸이 후끈후끈했다. 할머니는 숨을 푸흡-푸-읍 하고 내쉬었다. 할머니라고 이 더위가 괜찮으실까. 더 최악이시겠지.


아들과 딸들

엄마가 퇴근하고 집에 들어왔다. "아 엄마는 나한테 선풍기 사오래". 외할머니 이야기였다. "선풍기 두 대가 있는데 한 대가 전선이 타버렸대. 근데 나머지 하나는 오래 돌아가면 빨간불이 켜진대. 걔 하나만 틀기 무서우니까 하나 사오래. 근데 언니 오빠들 말고 꼭 나보고. 그 말만 하고 끊었다니까." 나도 외할머니 화법을 알아서 짐작이 갔다. 대답은 듣지 않고 본인 말만 하고 끊으시는 게 화법이다. 그리고 사투리 때문에 억양을 조금만 높여도 화내는 것처럼 들린다. "회사 끝나고 배고파 죽겠는데 전화받았더니 그 말만 하고 끊었다니까. 엄마도 진짜!"

찬을 이것저것 꺼내며 엄마는 저녁을 먹었다. 올해 여름이 무진장 덥긴 덥다에서부터 에어컨 렌탈, 요즘 선풍기 값, 외할머니가 끔찍이 아끼는 삼촌들 이야기 별별 등등의 이야기를 숟가락을 놓을 때까지 했다. 엄마는 저녁 찬으로 선풍기를 드신 셈이다.


선풍기

바로 다음날 엄마 퇴근시간에 맞춰 전화가 왔다. "선풍기 사러 가게 옷 입고 아빠랑 나와". 결국 이렇게 살 거면서 왜 어제 그렇게 궁시렁 궁시렁 이었을까? 마트에 가서 제일 시원한 선풍기를 골라 계산하고 아빠 차에 실었다. "내일 가져다 드리자. 아니 지금 갈까? 아니야 늦었다. 내일 오전에 바로 가자." 다음날 함평 시골집에는 다시 두 대의 선풍기가 생겼다.


내방 쓰레기통

엄마는 내 방에 있는 쓰레기통을 볼 때마다 도대체 언제 비울 거냐고 묻는다. 난 항상 '나중에'라고 답했고, 나의 나중은 항상 엄마보다 늦었다. 내 방 쓰레기통은 엄마 덕분에 항상 깨끗하다. 그것을 아는 내가 찔려서 그때마다 죄스럽다. 마지막 찔림은 엄마보다 빨랐으면 좋겠다.


선풍기에 담긴 마음

선풍기에는 내가 조금만 알아야 할 것 같은 묵직한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을 다 알면 벅차서 울컥할 것 같다. 저녁 바람이 선선하다. 이 바람에 외할머니의 여름과 엄마의 마음이 한결 시원해졌기를 바라는 마음을 날려보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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