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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형 Dec 31. 2020

여름의 빌라

작은 세계속의 우리

행복에는 정해진 양이 있어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처럼, 다급히 내가 "그건 나쁜 거 아닐까. 언니는 남의 가정을 망가뜨리고 싶어?"라고 언니에게 말했을 때의 그 눈빛. 억지로 웃으려고 하지만 끝내 물에 녹아내리는 물감처럼 한없이 희미해지던.
<시간의 궤적>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신의 기억이 소멸되는 것마저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순리라고 한다면 나는 폐허 위에 끝까지 살아 남아 창공을 항해 푸르게 뻗어가는 당신의 마지막 기억이 이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름의 빌라>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인생의 결정적인 한 장면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는 평생 이렇게, 나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것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그 장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고, 그때 나는 창밖으로 떨어져 내리는 아름다운 눈송이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고요한 사건>
"엄마한테는 세상에서 연애가 가장 중요해?"
"가장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취업보다야 연애가 훨씬 중요하지. 사랑받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건데."
엄마는 정말 모르는 걸까? 서서히 드리우는 어둠의 장막 위로 눈송이가 돌풍을 타고 솟구쳐 오르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엄마에게 제대로 사랑을 받지도 못한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긴 했겠느냐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한번 말을 꺼내자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고조되었다. 그녀는 엄마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그 대단한 사랑이 나와 아빠를 얼마나 고독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퍼부었다.
<폭설>
불현듯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누구에게도 떼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일찍 철이 든 척했지만 그녀의 삶은 그저 거대한 체념에 불과했음을.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오래전, 스스로 너무 늙었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아직 새파랗게 젊던 시절에 할머니는 늙는다는 게 몸과 마음이 같은 속도로 퇴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굳는 속도에 따라 욕망이나 갈망도 퇴화하는. 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알았다. 퇴화하는 것은 육체뿐이라는 사실을.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어김없이 인간이 평생 지은 죄를 벌하기 위해 신이 인간을 늙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음은 펄떡펄떡 뛰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데 육신이 따라주지 않는 것만큼 무서운 형벌이 또 있을까?
<흑설탕 캔디>
그는 그녀를 끌어안아주면서, 우리는 안고 있어도 왜 이렇게 고독한 것일까, 속으로 되뇔 뿐이었다.
<아주 잠깐 동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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