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인 것도, 특별한 것도, 그 외의 것도 없다
막연히 더 완벽한 무언가를 가지고 싶었을 뿐이다. 평화와 안온함의 상징, 단란하고 완결된 가족을. 때로는 뭔가를 더 완성시키기 위해 힘을 보태는 것이 모든 것을 어그러지게 한다는 걸, 그때는 몰랐었다.
"늙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몰라. 변한다는 걸 빼곤 확실한 게 없으니까. 너희가 본 할머니도 마찬가지야. 이름은 지윤이지만 누구도 이름을 불러주진 않지. 지윤인 가진게 참 많았어. 그런데 이제는 그것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단다. 자기도 모르게 사라져버린 이름처럼 말이야."
언젠가 민아도 속 모르는 윗세대의 말에 부들부들 떨고 분노했었다. 그들이 가졌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해 성토했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젊음이 희미해질 무렵부터는 그런 종류의 불행이 배부른 투정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민아는 정확히 자신이 증오했던 어른의 모습이 되어갔다. 달리 말하면 늙어간다는 건 이해할 수 없던 걸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편입과 적응 그리고 순응으로 이어지는 생활 속에 내 삶을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논쟁은 점차 본질에서 벗어났고 세상은 우리의 시선을 조금씩 비틀어놓더니 종내는 서로를 끝 간 데까지 이기적인 요즘 여자와 시대에 뒤떨어진 한심한 한국 남자로 결론짓게 만들었다.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굳이 블렌딩 될 필요 없다고요. 결국 마이웨이로 사는 사람이 살아남아요.
나는 사슬처럼 엮인 타인들 간의 관계를 생각했다. 그 사이 어디쯤에 위치해야 하는지 잠깐 머리도 굴려봤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은 이 순간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의 먼 과거가 되길 바라며 하염없이 서 있는 것뿐이었다. 내 어깨 위의 무게감이 다만 근육의 피로감이기를, 절망의 그림자가 나를 덮치지 않기를, 불행과 우울의 악취가 스며들지 않기를, 집주인의 말대로 이 집에 온 뒤로 모든 일이 다 잘 풀리기를 기도하면서.
기본적인 예의와 사회성을 갖추고 때로는 억울함을 견디며 손해보는 느낌을 묵묵히 참아 넘기는 것. 그것이 나 같은 노동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소리 없는 투쟁이다.
아마도 나는 변함없이 상자 안에 숨어서 안전한 삶을 꿈꿀 거다. 이미 굳어진 어른의 마음은 쉽게 변하기 힘든 법이니까. 그렇지만 누군가를 향해 손을 멀리 뻗지는 못한다 해도 주먹 쥔 손을 펴서 누군가와 악수를 나눌 용기쯤은 가끔씩 내볼 수 있을까
나를 들여다보는 일, 타인을 들여다보는 일.
이해라는 행위에서 가장 우선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 아닐까? 꼭 이해의 행위로 번지기 전에 스스로가 (작가의 말처럼)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누군가와의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
가끔은 나와 타인에게 비췄던 시선의 끝이 나를 다른 길로 인도하기도 한다. 평생을 원망했던 이를 어느 순간 용서하게 되는 것처럼, 누군가의 알 수 없던 선택을 존중하게 되는 것처럼.
나의 생각, 공간, 세상을 들여다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누군가를 그대로 품는 일이 그리 불편한 일은 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당신인 순간이, 당신이 나인 순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