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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Jul 04. 2018

스무번째 요가이야기

나바아사나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은 거기에 무언가 있기 때문이다.





너무 자주 만나서 무뎌지기도 하고, 너무 오래 만나지 못해 무뎌지기도 한다. 그런 것을 보면 사람은 정말 무뎌지기 쉬운 존재인 것만 같다. 좋은 타이밍에 만나 한 시절을 즐겁게 보낸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좋았다, 는 마음과 왜인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은 울렁이는 마음이 함께 올라온다. 어느 시기가 지나고 나면 정해진 수순처럼 매번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친구들. 삶이 달라졌고, 가족이 달라졌고, 사는 곳까지 물리적으로 모두 변하여서 아무도 서로에게 실망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마음까지 떨어져버린 사람들. 선을 긋고 선의 반대편으로 달려온 것도 아닌데 어느새 서로 어떻게 지내는지는 함께한 추억이 없는 타인이 아는 정도로만 알게 되어버린 우리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문득 어느 날에는 있었던 일이 없어진 것 같고, 없었던 일이 있었던 것인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어떤 시간. 무뎌져서 거기에 있었던 것이 맞는지 질문하다가 막상 만나면 무릎을 끌어안고 웃으며 맞아, 있었지, 이런 표정의 너와 이렇게 말하는 내가, 하게 된다.

언젠가 춤을 추다가 내 발과 타인의 발이 세게 부딪혀 발톱이 다친 적이 있었다. 빠지려나 싶었는데 별일이 없어보여서 마냥 기다리고 있다가 통증이 느껴지면 그제서야 혼자 살던 집의 침실에 동그랗게 등을 말고 앉아서 발을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흐르자 발톱의 뿌리부분에 멍이 들었고 통증이 시작되어서, 나는 다친 부분이 아니라 다른 곳이 아픈 발톱이 이상했다. 그래서 전보다 조금 더 길게 바라보았다. 친구의 작업실에 가려던 어느 저녁에 멍들지 않은, 색도 그대로이고 통증도 없는 발톱을 만져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아서 ‘역시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인가’ 싶었는데 핀셋으로 들어올리자 툭 하고 윗부분의 발톱이 떨어져나왔다. 발을 부딪힌 그때에 죽어버린 발톱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멍이 들수도 통증이 느껴질 수 없었다는 것을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발톱의 뿌리부분에서 이제 막 솟아오르는 부분은 살아있어서, 살아있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멍이 들기도 하고, 아프기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바사나를 할 때면 복부가 흔들릴 때마다 나의 약함을 느끼고 거기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고 자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는 떨림도 있을 수가 없다.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은 거기에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있으니 몸을 움직이기도 하고, 배가 당기도록 웃기도 하는 거겠지. 그러니 조금 약해진 것쯤으로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소중한 것을 잃은 표정은 짓지 않기로 한다.

다른 방향으로 길을 틀어 한참을 걸어온 우리들이 때때로 한 모퉁이에서 만나서 매번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어,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도 어쩌면 우리에게 아직 소중한 기억이 깊숙한 곳에 있기 때문이니까.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아 언제든 만날 수 있을테니 서운한 표정은 짓지 않기로 한다.






글/ 예슬 (brunch.co.kr/@yogajourney)
그림/ 민지 (brunch.co.kr/@am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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