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버들 Jan 09. 2019

마흔여섯번째 요가이야기


기다림의 즐거움.

“광화문에서 한 시에 만나.” 라고 친구가 이야기하면, 나는 열두시에 가급적 도착하려고 한다. 열두시에 도착해 서점에 가서 느긋한 마음으로 책을 고르고, 근처 카페에 들어가 책을 읽으며 기다리거나 한 시간 내내 서점에서 책을 고르기만 해도 좋다. 눈에 보이는 한 시간이 주어진 것이 몹시 기뻐진다. 활자에 집중하다가 이제 한참 그 세계로 빨려들어가는 시점에 친구가 ’도착!’ 같은 기분 좋은 메시지를 보내주니까. 메시지를 확인하고 발그레한 마음으로 고개를 들면 좋아하는 사람이 활짝 웃어줄테니까. 친구가 조금 늦으면 그야말로 좋은 일이다. 집중하게된 그 세계에서 조금 더 마음 놓고 헤엄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종종 늦는 친구들이 고맙다.

기다리는 일이 좋다. 기다리면 반드시 오게될 사람을 기다리는 일은 말할 필요도 없이 좋고, 작은 음식점에 가서 음식이 만들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기다리는 일도 좋아한다. 정해진 어떤 날을 스스로를 살피며 기다리는 일도 좋은데,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차곡차곡 덧입혀지는 시간은 그대로 참 아름답기 때문에. 긴 여행 중에는 비용을 아끼려고 공항 노숙을 하며 새벽 비행기를 기다리기도 하고, 하루를 온전히 환승 비행기 기다리는 일에만 썼던 날도 있었는데 그마저도 좋아서 조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지난 연말에 한국에 왔던 엄마를 배웅하러 공항에 가면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엄마는 비행기 기다리는 시간은 어쩐지 아깝다고 하시면서 “공항에서 멍하니 있거나 책을 읽거나 뭘 쓰길 좋아하는 너는 참 신기하다.” 말씀하셨다. ‘이상한가’ 하고 갸웃거렸었지만 누군가가 “그건 정말 보통이 아닌것 같아.” 라고 이야기하니 그것은 왠지 나만의 모습 같아서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아, 다들 그런 것은 아니구나, 그럼 그건 나의 특성인 것일까.’ 하는 생각도 했다.

매트 위에서는 종종 그럴수가 없다. 기다리고 있는 그 아사나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고, 반드시 나를 배반하지 않고 와줄것이라는 확신이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기다리면서 노력해보았으니 감감 무소식인 아사나가 여전히 많아서 믿음이 부족한 것일까? 시간이 필요한 일은 재촉해보아도 서둘러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동작을 할 때면 그 사실을 자꾸만 잊어버린다. ‘왜 아직이지? 언제 오는 거지? 오기는 오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키가 작다. 언제나 자그마한 아이였지만 그런 나에게도 혹시 이대로라면 키다리가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인생의 시점이 있었다. 열한살 여름방학에 나는 키가 7센티미터나 자랐다. 135.5센티미터에서 142.7센티미터로. 너무 파격적으로 커버렸던 시기라서 소수점까지 기억하고 있다. 키가 무럭무럭 자라면서 얼굴의 생김새도 조금 달라졌었는데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전조없이 일어난 일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키를 재는 벽이 있었다. 부모님의 방에서 나와 오른쪽 벽이었는데 거기에는 굵기가 다른 여러가지 펜으로 그어놓은 짧은 가로선들 옆에 날짜와 키높이가 적혀있었다. 키를 재는 일이 크게 의미없을 정도로 매번 비슷한 가로선이 반복 되었었는데 어느날 그렇게 커버린 것이다. 선을 그으며 애타게 기다렸는데 소리도 없이 기다렸던 일은 찾아왔고, 훌쩍 컸지만 여전히 나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변화는 소리를 내며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혁명이 아닌 이상 마음이 만드는 변화도 몸이 만드는 변화도 소리 소문없이 나를 찾아온다. 그리고 찾아온지도 모르고 한참 그렇게 살다가 문득 키를 재는 날이 오면 알게 되는 것이다. 기다렸던 일이 이미 와버린 것을 나는 몰랐구나, 하고.

요가를 시작할 때에는 어떻게 한 발로 저렇게 의연하게 많은 사람들이 서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에 놀랐지만 이제는 한 발로 서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한다. 하누만아사나를 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다리 모양이 어떻게 저런 식으로 바뀔 수 있는가! 에 놀랐지만 이제는 손을 떼어 하늘로 올리기도 한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뒤집혀있는가! 놀라며 머리서기를 바라보았지만 이제는 머리서기를 하며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이렇게 해야해요.” 라고 이야기도 한다. 그러니까 변화는 소리를 내며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몸에게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선물한다. 나를 기다려준다. 기다림을 좋아하는 내가 유독 나를 기다리는 일에만 서툴렀다는 것을 인정한다. 어느 때에 어떤 변화가 찾아와도 모두 환영한다.



글/ 예슬 (brunch.co.kr/@yogajourney)
그림/ 민지 (brunch.co.kr/@am327)




작가의 이전글 마흔다섯번째 요가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