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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Apr 04. 2018

일곱번째 요가이야기

다누라사나



내 안에 세계가 있다.


여백이 없는 너무 단정적인 말은 때로 나를 흔들며 물음표를 쏟아낸다. 다정한 의도의 좋은 말일 때에도 그런 것을 보면 정말 그런 것만 같다. 너무 훌륭하기만 하다는 말도 가만히 듣다보면 '나도 못난 모습일 때가 있는데' 하고 생각하게 되고, 뾰족하게 날이 선 말을 들으면 '내가 항상 그런 것은 아닌데'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건 변명일까? 위로받고 싶은 마음도 이해받고 싶은 마음도 사랑받고 싶은 마음도 아니다. 도망치고 싶거나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냥 그 모든 것의 총합이 나인데 하나의 내 모습을 가리키며  "너는 그런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맞아요. 저는 그런 모습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그런 사람인 것은 아니예요."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변명인지 아닌지는 어쩌면 나 자신만 알고 있지 않을까?

한 사람은 하나의 거대한 세계이다. 그 사람의 내부에는 커다란 스팩트럼이 있다. 다양한 스팩트럼을 가진 그가, 때로 나에게는 한가지 색으로 보일 때도 있지만 그 사람이 그 색인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붉은 색도, 푸른 색도, 암흑같은 색도, 하얀 색도 있는데 마침 나를 만났을 때 그가 붉은 빛이었다고 하여서 뒤늦게 그에게, "내가 아는 너는 분명 붉은 색이었는데 왜 지금 검정이야?"하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그런데 가끔은 나조차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하게 된다. '이건 잘 하는 거 아니었어?', '왜 그렇게 못난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나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된 날에는 시무룩해진다. 바싹 마른 운동장에서 커다란 물주전자에 담긴 물을 졸졸졸 흘려 선을 긋던 어느 여름처럼 내가 마음에 두꺼운 선 하나를 긋는다. 그 선의 안에 있는 것만 나라고 생각하면서 나 조차 나에게,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운동장에 새겨진 듯 선명했던 선들은 어느새 희미해진다. 점점 옅어지다가 사라지고 만다. 내 마음에 새겨진 선들도 그렇다. 강한 것도 나이고, 약한 것도 나이고, 가끔 멋있는 행동을 하는 것도 나이고, 때로 숨고 싶을 만큼 못난 마음을 끌어안는 것도 나이다.

그런 날이 있어도 괜찮아, 나에게 이야기해준다.

많은 요가 동작들이 하나같이 재미있는 것은 강함 만으로 할 수 있는 동작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방식으로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강함과 유연함, 단단함과 부드러움을 함께 지녀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다누라사나를 하다보면 단단함과 부드러움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가장 지면과 가까운 면, 복부가 단단하게 힘을 내어 주어야 부드러워야 하는 곳, 흉부와 어깨가 유연해질 수 있고 그제서야 다누라사나의 느낌을 찾아가게 된다. 작은 내 몸 안에는 단단해야 안전한 곳과 부드러워야 숨이 퍼질 수 있는 곳이 모두 함께 있다. 몸은 계속 변화하니까 나이가 들면서 아픈 곳이 있을 수도 있고, 새로운 방식으로 움직이면 몸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고, 반복하다 보면 몸이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내가 기억한다. 그리고 몸의 회복력처럼 마음에도 회복력이 필요하다.

'나'라는 세계를 본다. 잘 웃는 것도 나고, 힘이 들 때 울어버리는 것도 나고, 나에게 좋은 이야기를 건네는 것도 나고, 나에게 흉터가 남는 말을 하는 것도 나이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런 날도 있다. 내 안에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진 내가 있다는 것을 알고 한 가지 모습의 나만 진짜 나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면 감정에 휘둘리는 시간이 줄어든다. 마음 회복력이 생기는 것이다.

내 안에 세계가 있다. 당신의 내부도 그렇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글/ 예슬 (brunch.co.kr/@yogajourney)
그림/ 민지 (brunch.co.kr/@am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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