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밤 산책의 첫걸음은 산뜻했습니다.
날이 저물고 노을이 지는 저수지의 풍경은 평온했고요.
사부작사부작 걸으면 그리 덥지 않을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품고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금세 땀에 젖어 연신 손부채질을 하기까지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죠.
그렇지만 기분은 기대했던 대로 산뜻했습니다.
땀이 준 선물입니다.
잠시 덥다고 흘린 땀으로는 산뜻함을 느끼기가 힘듭니다.
거친 노동과 힘든 산책으로 땀을 흘릴 때,
그러니까 나를 잊어버리거나 혹은 나에게 온전히 몰두할 수 있는 노동과 산책을 할 때,
왠지 모를 개운한 기분을 느끼기도 합니다.
아마 이 날이 그런 날이었나 봅니다.
해 질 녘 저수지는 차츰 실루엣만 남기고 작은 불빛만 반짝입니다.
나도 저 실루엣에 가려져 나를 지워봅니다.
어둠에 묻히는 것은 비단 주변 풍경뿐만이 아닙니다.
나도 함께 가려 어둠의 베일 뒤로 사라집니다.
분홍의 하늘은 물결 위에 드리워졌고,
산책로의 불빛이 하늘과 물의 경계를 가릅니다.
나의 몸과 의식도 저 경계선을 따라 잠시 서로 떨어지려 합니다.
아, 갑자기 배가 아픕니다.
비싼 프랑스 요리를 얻어먹은 게 너무나 황송했나 봅니다.
지인을 떠나 보내고 급히 카페에 들어갑니다.
모든 번뇌를 떨쳐낸 뒤 아이스티 한 잔으로 어수선한 시간을 달랩니다.
저녁 노을 산책길의 상념도 같이 흘려 보냈는지 갑자기 멍해지네요.
다시 저수지 쪽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다 보내고 혼자 남은 시간.
실루엣을 남긴 풍경과 마주하는 시간입니다.
어디가 산이고 물인지 모르고, 또 길인지 모를.
살다 보면,
실체를 알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때마다 맹렬하게 그 실체를 파악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실루엣은 실루엣으로 남겨야 그 아름다움도 볼 수 있습니다.
환한 저수지의 풍경보다 실루엣에 빠져 듭니다.
불빛과 노을, 소소한 바람이 나의 몸을 감쌉니다.
다시 시선은 저수지의 실루엣으로 향합니다.
보이지 않아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한 작은 기쁨에 만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