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들으며 나를 볼 수 있다면

by 글담



연일 하늘은 사람 속을 애태웁니다.

비가 올 듯 말 듯한 게 감질나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네요.

언제 내릴지 모르는 비에 카페 뒤 테라스와 옥상 정원을 오갑니다.

행여나 내리는 비에 물건과 가구 들이 젖을까,

분리 수거를 해둔 봉지에 물이 들어갈까 살핍니다.

어디에서는 가뭄 탓에 발을 동동 구르고,

또 어딘가에서는 폭우 때문에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비가 오나 안 오나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이 씁쓸하기만 합니다.


궂긴 날씨 탓인지 카페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합니다.

혼자서 텅빈 공간을 어슬렁거립니다.

읽던 책도

쓰던 글도

하던 생각마저 일단 내려놓고 새삼 공간 곳곳을 두리번거립니다.

귀 잘린 고양이가 공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전 카페부터 오랫동안 함께했는데,

사람들의 손길에 귀를 잃어버렸나 봅니다.

만지작거리다가,

혹은 이리저리 옮기다가 말이죠.


귀를 잃어버리면 뭔가를 들을 수 없을까요?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보면,

“음악이 들릴 때 우리는 그것이 시간의 한 양태라는 것을 잊은 채 멜로디를 듣는다.

오케스트라가 소리를 내지 않게 되면 우리는 그때 시간을 듣게 된다.

시간 그 자체를.”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하루 종일 음악이 나오는 카페인데,

귀를 잃어버렸으니 고양이는 멜로디를 듣지 않고 시간을 듣는 걸까요?

영원의 시간,

지루한 시간,

쉼의 시간.

다양한 시간의 변주를 들으며 들리지 않는 소리를 달래는 건 아닐까요.


가끔은 침묵에 갇혀 시간을 듣고 싶습니다.

소리와 소리 사이의 시간을.

그 시간을 듣는다는 것은 아마도 나를 보는 것일 테죠.

삶과 삶,

소리와 소리,

사람과 사람.

이 각각의 사이에 잠시 멈추고 시간을 들을 수 있다면 나를 볼 수 있겠죠.


카페의 음악을 잠시 멈추려는데,

갑자기 하나둘 사람들이 공간에 들어섭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카페지기와 오랜 지인까지.

시간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은 가지지 못하겠지만,

정다운 수다 소리에 파묻히겠네요.

이 또한 나를 볼 수 있는 시간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