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동 트는 동녘 하늘을 보며 고독의 시간을 떠올려 봅니다.
나는 얼마나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대화를 하며 고독한 사유를 했는지 곱씹어 봅니다.
이상하리만치 그날 이른 아침은 사유라는 단어에 꽂혀 스스로에게 연신 말을 겁니다.
그러다 이내 기차를 타고 잠이 들어버렸지만.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자신과의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고독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즉 자신과 대화를 먼저 나누라는 것이지요.
이른바 철학자적 고독이라 부르기도 하는데요.
고독한 시간에서 스스로와 나누는 대화가 도피와 침잠이라면 곤란하겠지만,
어떠한 변화, 그리고 사유를 통한 내면의 양심을 끄집어내는 대화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치열한 사유를 통해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임을 깨달으라는 말인데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델포이 신탁의 의미는 무지의 상태를 깨닫고 진리를 사유하라는 것이겠죠.
한동안 다스렸던 불면증이 다시 도지고 말았습니다.
자다가 깨다가,
선잠에서 깨어남으로 오가는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죠.
어떤 작가는 “수면과 불면 사이의 그 황홀한 흔들림을”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나에겐 황홀함이 아니라 그저 달갑지 않은 불청객이 찾아와 생긴 불편함입니다.
사유하는 것과 무사유의 시간을 하릴없이 보내는 것 사이에서 갈팡질팡 헤매는 불면의 시간.
여전히 관성은 무사유의 시간으로 향하도록 합니다.
사유의 무거움과 번거로움보다 안락한 잠자리가 편하니까요.
게으른 시간은 무사유로 이어져 무력한 자신의 알몸을 보게 하지요.
그나마 자신의 민낯과 알몸을 볼 수라도 있다면 다행이라 할까요.
무지의 자신을 마주 대하는 것이 ‘너 자신을 아는’ 것이자 또 용기를 필요로 하니까요.
고독의 사유를 하지 못하면 외로움이 찾아옵니다.
세상을 마주하지 못하고 혼자만의 외로움에 빠지는 것이죠.
철학자들은 고독의 순간, 내면과의 대화를 할 때가 가장 덜 외롭다고 하죠.
그러고 보면 나는 고독보다 외로운 듯합니다.
그래서 글쓰기가 더욱 간절할 때입니다.
외로움이 아니라 고독의 사유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