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풀렸다는데,
새벽 공기는 여전히 정신을 번쩍 들게 합니다.
잠시 밖을 오가며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고 하늘을 바라봅니다.
저편 하늘에 붉은 새벽달이 동그랗게 머물고 있네요.
아직은 생각의 시간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고요한 새벽에 사유를 즐기라고 말이죠.
졸지 말고.
저 달까지 가는 길은 무척이나 멀고도 또 눈앞에 있는 듯 가깝습니다.
얼마나 많이 뜨고 또 지던 세월이었을까요?
오늘처럼 보름달이 됐다가 초승달로 바뀌는 것만큼이나 세상도 뒤바뀌곤 했을 테죠.
저 달이 바라보는 세상은 한낱 먼지가 일었다가 가라앉는 것처럼 별 게 아닐 수도 있겠죠.
그만큼 하찮은 인간의 세상은 지금도 복작대며 마치 대단한 역사를 쓰는 듯합니다.
그래봤자 달이 지고 뜨는 시간 안에 머물면서 말이죠.
그런데도 시끌시끌합니다.
과거를 쉽게 잊어버리고 실체 없는 미래를 떠드는 무리들의 소리에 세상이 소란스럽습니다.
저 새벽달은 지금 떠들어대는 억지와 궤변에 얼굴을 붉히는 듯합니다.
반성이 없는 용서와 화해의 현장을 보며 화가 난 것처럼 말이죠.
참혹했던 과거에 얽매이고 있을 수만은 없겠지만,
그 과거의 기억을 지우려 하고,
그 과거의 아픔을 힘으로 잠재우려 하는 것은 또 한 번의 폭력입니다.
둥근 새벽달은 조각난 파편의 달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게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죠.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보름달에서 다시 초승달로 돌고 돌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꺼번에 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러고 있을까요?
과거는 덮어버리고,
아픔은 지우고,
실체를 알 수 없는 미래로 함께 가자고 합니다.
새벽달은 묻습니다.
그 ‘함께’가 누군인지를요.
징용과 위안부의 아픔을 외면하고 함께 갈 그들이 누구인가요?
오늘따라 새벽달의 정취는 아름다움보다 깊은 아픔을 떠올리게 하는군요.
그때 그 시절의 아픔을 지켜봤을 새벽달이라 생각하니 말이죠.
눈물로 얼룩진 그때의 달이 저리 머물며 우리를 바라봅니다.
화해와 용서.
그것은 반성과 사과가 앞설 때 가능합니다.
그나저나 부끄러움은 우리 몫일진대 왜 새벽달이 부끄러워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