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담 Jun 11. 2024

이름만 부른다고 해서 비로소 꽃이 되는 걸까

뜨겁군요.

공기는 한껏 부풀어 오른 듯하고요.

사람들은 저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햇살을 피하려 그늘진 곳으로 피합니다.

더운 데다가 내 피부는 소중하니까요.

햇살이 너무 뜨거운 나머지 곳곳에 피어 있는 꽃들도 시무룩합니다.


시무룩한 꽃들이 사방천지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그늘과 햇살이 어우러진 절묘한 틈에서 꽃무릇은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시들지도 않은 채 고고한 자태를 뽐냅니다.

꽃 앞에서는 늘 그렇듯이 너무나 예뻐 잠시 발걸음을 멈춥니다.

아름다운 꽃의 이름을 떠올리며 이름을 불러봅니다.

그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꽃이 된다는 시의 한 구절을 떠올리면서.


사람은 저마다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 이름을 불러줄 때 고유한 한 사람이 됩니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 혹은 그녀는 어떤 사람이란 걸 떠올립니다.

그럼에도 단 하나의 색깔로 그 사람을 표현하기가 힘듭니다.

당연하죠.

여러 색깔이 모여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뿐이니까요.

한 색깔만 보고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치만 종종 이 사실을 잊습니다.

한 색깔로 그 이름을 부르고 상대를 규정합니다.

그러면서 다 안다고, 이해한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합니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과 읽는 것은 다릅니다.

뭘 해야 한다는 주장은 쉽게 할 수 있지만,

뭘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바라보고 대하는 것도 다르지 않죠.

고귀하고 동등한 존재이니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말,

편견과 혐오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차별을 하는 행위.


말과 행위 사이의 행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존재를 인정했을 때 그제야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뜻을 모른 채 이름만 마구 부른다고 해서,

혹은 뻔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한다고 해서 의미를 갖는 게 아닙니다.

되려 의미를 훼손하고 말죠.


꽃무릇은 꽃무릇 자체로 존재하고 보여줄 뿐인데.

다소곳하다가도 도도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꽃을 보며 또 배웁니다.

산책이 즐거운 이유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꽃보다 햇살을 담고 싶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