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퍼부은 비가 그친 날.
그저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려 했습니다.
시원한 카페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빗속에서.
끈적이는 공기를 느끼고,
튀어 오르는 흙냄새를 맡으며 빗속에서 서 있고 싶었습니다.
마치 비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능소화처럼.
낯선 동네 골목길 능소화의 시간은 느리게 가는 듯합니다.
달력의 시간은 어느새 한 해의 절반을 넘겼는데,
능소화의 시간은 정적인 공간을 담아서인지 느릿느릿 흘러갑니다.
인간의 시간,
인간이 느끼는 시간의 느림,
인간이 생각하는 쉼의 시간과는 다른 여유로운 시간입니다.
작업할 공간이 마땅히 없어 늘 찾는 카페는 한가합니다.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음률에 따라 한 글자씩 적어 갑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느리게 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바깥을 바라봅니다.
느리게 시간이 간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면서요.
시간의 감속, 혹은 느림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대에 느리게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노동의 연장일 뿐입니다.
쉰다는 것이 ‘재충전’이라 불리는 이유가 뭘까요?
노동을 위한 휴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이러한 휴식이나 느림의 시간은 굴레이자 노동의 현상일 뿐이라고 하죠.
‘성과’라는 단어에 얽매인 노예의 삶과 시간을 보낼 뿐이라고.
능소화는 스스로 굴레에 빠지는 인간을 처연하게 바라봅니다.
모가지는 늘어뜨렸지만,
얼굴은 하늘을 향해 바라봅니다.
굴레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가는 시간과 바람에 몸을 맡깁니다.
어쩌면 나는 능소화의 자유를 꿈꾸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