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멀리 여행간다는 것은 나로부터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여행으로 현실을 잠시 잊고자 할 때가 있잖아요.
새로운 계기를 찾는다거나,
마음을 다잡는다는 등 여러 이유를 붙여보지만
결국은 나로부터 달아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여행을 떠나면 이것저것 챙길 게 많습니다.
한 가득 지고 가야 할 무거운 짐보다 마음이 천근만근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떠나는데 그보다 더 무거운 마음을 떠안았습니다.
나로부터 달아나려는 여행이니 가는 내내 발버둥을 쳐야만 했습니다.
이 무거운 여행이 한순간에 가벼워지는 순간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후식으로 뭐 먹을래?”
“음, 커피요?” “무슨 커피?” “아메리카노요.” “왓 더…”
프랑스의 덩케르크에서 만난 아랍 식당의 주인은 예전에 한국을 다녀온 인연으로 친근히 대해줬습니다.
시킨 음식보다 더 많은 먹을 것과 공짜 와인까지 얻어 먹었답니다.
그런데 커피를 아메리카노로 달라는 말이 화근이 됐습니다.
대뜸 화를 내며 어찌 그런 싸구려 쓰레기를 먹느냐고 나무랐습니다.
“이봐, 커피는 이탈리아 커피지.”
커피의 맛과 역사를 프랑스에서 아랍 사람에게 이탈리아식 커피를 마시며 영어로 듣는 광경이라니.
이 기묘한 광경이 여행의 묘미였습니다.
한순간에 나로부터 달아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진한 에스프레소를 들이킵니다.
와인과 에스프레소에 주인장의 정까지 어우러진 늦은 점심이 구원이었습니다.
이제야 가벼운 여행길로 나설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멋진 풍경과 사진 몇 장 남기는 것보다 우연의 인연이 일깨워준 그때의 기억이 오래 남습니다.
나로부터 도망가는 게 어때서요.
패배의식이니 도피니 하며 웅크릴 필요는 없는 듯합니다.
어차피 도망가봤자 결국 나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는 여행인데.
그저 그리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여정에서 무거운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면 좋은 거죠.
아마 그때 이 단순한 이치를 깨달았나 봅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무거운 몸을 이끌며 남은 일정을 보냈더랬습니다.
요즘따라 무척이나 떠나고 싶네요.
갇혀 있는 답답함보다 또 나로부터 도망치려는 마음이 앞섭니다.
생각을 비울 때가 된 듯합니다.
가을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