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때는 당연하다는 듯 노트북을 열고 두드립니다.
사실 예전에 원고를 연필로 쓰려던 적이 있었습니다.
머릿속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연필을 쥔 손놀림.
답답했었죠.
잠시라도 뒤쳐지면 머릿속 생각이나 문장이 날아갈까 봐 연필을 내려 놓았습니다.
지우고 다시 쓰고 저장하고 버리는 편리함마저 느껴버렸을 때,
가방에서 필통을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글이나 생각이 영글어지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다시 연필을 쥡니다.
뭔가를 쓰겠다는 것보다 어떤 의식을 치르듯 말이죠.
하얀 노트에 새겨지는 삐뚤빼뚤 글씨가 마치 글의 저장고를 채우는 듯한 그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노트북을 꺼내 듭니다.
속도가 붙어야 할 때는 어쩔 수 없거든요.
사각사각.
연필이 종이 위에 긁히는 질감과 소리는 타자기의 소리처럼 마음을 편하게 해줍니다.
뭔가를 쓰고 있다는,
뭔가를 만들고 있다는,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생생한 기분을 들게 합니다.
이마저도 안 될 때는 고개를 듭니다.
가을날 늦은 오후의 벽면에 빛이 들어옵니다.
사각사각.
빛은 벽면에 연필로 뭔가를 그리듯 사각사각 음양의 경계를 만듭니다.
차츰 빛의 영역이 줄어들자,
사각사각 빛의 소리도 줄어듭니다.
들리지 않는 빛의 소리를 본다는 착각은 기분 좋은 엉뚱함이죠.
그 엉뚱함이 오늘도 이렇게 글 한 자락 남겨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