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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구름 Aug 02. 2022

92_ 자식이 부모를 모시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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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여 늙어서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근심하며 그것만은 막으리라 단호하게 얘기하는 어른을 볼 때면 나는 심드렁한 표정이 된다. 그런 바람은 바라지 않아도 대부분 이루어질 거라는 걸 기 때문이다.


그걸 어찌 아는지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길게 얘기할 뭐 있나 싶었다. 나의 조부모, 친구나 지인에 조부모는 누가 모시고 사는지, 칠팔십이 넘은 부모를 모시는 사람이 주변에 얼마나 있는지 둘러보기만 해도 부모 모시는 자식이 얼마나 드문지는 쉬이 알 수 있는 일이라.


건강한 부모와도 함께 살기 어려운 마당에 아픈 부모를 모시기란 가능하기나 할까? 내 부모님이 아플 때 내가 평생 모실 수 있는지만 따져봐도 그렇다. 보통은 본인의 재력에 맞춰 요양원이나 간병인을 쓰는 것이 최선이다. 긴 기간 몸이 쇠약하거나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픈 당사자였던 나는 너무도 잘 안다.


슬픈 일이지만, 부모가 없는 인간은 없고 부모보다 자식의 수가 많음에도 효도받는 부모는 보기 드물다. 그 효도라는 건 부모가 건강하실 때도 살뜰히 잘 챙기고 아프실 때는 정성으로 보살펴드리는 걸 뜻하는데 요즘은 장성한 자식이 손 안 벌리고 살아만 줘도 효도라고 하는 판이다.


자식들은 그 이유를 나 먹고살기 바쁘고 힘이 들기 때문이라 한다.

내 가정도 지켜야 하고, 아직 어린 내 새끼도 먹이고 키워야 하니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쓸 힘도 돈도 적다는 것이다. 솔직히 돈이 많으면 본인의 삶을 희생하며 부모를 모시려는 자식이 많아질까에 대해서는 상당히 의문이지만 말이다.


자식이 부자인 부모들도 가난한 이들과 똑같이 정부 지원금을 받는 경우가 있다. 자식의 부유함과 상관없이 당사자의 자산 상태에 따라 혜택을 주는 이유에는 부자 인 자식이 부모를 모시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라는 얘기를 들었다. 뜬소문이지만, 그 말에 설마가 아닌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건 정부 지원으로 사는 이들에게서 보고 들은 게 있기 때문이다.


대학병원에서 자식과 함께 오는 노인이 적은 걸 보고 투덜거리는 내게 어머니는 “아직 스스로 걸을 수 있는데 바쁜 자식 뭣 하러 고생시키냐, 그깟 암 때문에 자식들 힘들게 하기 싫다.”라는 것이 부모 마음이라고 하셨다. 자식이 병원비만 내줘도, 돈만 대줘도 고마운 거라고. 이미 자식이 모시기는커녕 돈만 내줘도 고마운 그런 세상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부모들은 자식이 나를 모시느라 고생할까 괜한 걱정을 한다.


아마 지금이야 말 한마디 다정히 안 해주고, 독립했다고 한 달에 1번 집에도 안 오지만 내가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 설마 내 자식이 나를 버릴까 하는 믿음이 깊기 때문인듯하다. 그런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될 듯한데도 정작 본인들은 그걸 모르는 듯하다. 내 나이가 서른이 넘어가니 주변에서 암이니 뭐니 주저앉는 사람들에 소식을 꾸준히 듣는다. 하지만 곁에서 자식이 돌봐주고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어쩌면 자식에 대한 기대가 노후 준비에 소홀한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던 때가 있다. 자식이 없는 사람은 도울 사람이 없다는 걸 잘 알아서 자신의 노후를 심각하게 고민하니까. 도움을 안 받을 거라면서도 은연중 그래도 설마 내 자식이 나를 버릴까 하는 믿음이 없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노후 준비를 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근데 실상 주변에서 부모를 모시는 자식은 볼 수가 없다.


자식이 정말 늙고 아픈 나를 돌봐줄까?

이젠 답을 NO라고 정해놓고 당장 자신의 노후를 준비하는 것이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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