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것 같네요.'

동행이 있었으면 참았을 것 같은 우연.

by Sunyeon 선연

지난주에 전시회를 보러 갈 일이 있었다. 가끔 지하철을 이용하다 보면 사람 구경을 하는 기분이 든다. 그날도 어쩌면 그런 날이었다. 가지각색 다른 빛깔을 가진 사람들,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바깥 날씨를 투명하게 볼 수 있는 순간들도 만나게 되고, 너머 풍경을 보다 보면 자연스레 앉아있는 사람들을 살펴보게 된다. 옷차림, 느낌, 가끔은 스마트폰을 보는 모습이나 책을 읽는 사람의 모습 등. 철저히 타인인 그 어떤 누군가의 삶을 슬쩍 들여다보는 느낌도 들고, 묘한 기분이 된다. 공상을 좋아하는 나는 상상도 잊지 않는다. 책을 읽는 사람의 책 첫 페이지가 접히지 않은 것을 보며, 이 사람은 책을 깨끗이 읽고 싶어 하는 사람이구나. 단정하다, 싶으면 슬몃 , 웃음이 난다거나.


뭐 그런 연유들로, 나는 '너머'의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을 꽤나 좋아하는 편인데, 그날은 2호선으로 갈아타고 40분 정도를 이동하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을지로 4가에서 내려 환승을 했다. 환승구간은 외국어가 많이 들리는 '관광객'의 구간이다. 그냥 내가 그렇게 정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환승을 하러 가는 길에서 들리는 외국어들. 그중 일본어가 들리면 유난히 기뻤다. 일본어를 공부 중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전에도 을지로에서 서울숲까지 가는 가족분들께 스몰톡을 시도했던 적이 있는데, 그날. 나는 내 눈앞 사선 방향에서, 성수역까지 가는 일본인 커플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캐리어를 든 커플은, 언뜻 보아도 마지막 날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가만히 '서울숲, 아니면 성수까지 가겠구나' 보이지 않게 중얼거렸다. 최근 핫해진 성수동이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곳이라는 것 정도는 익히 알고 있다. 목적지를 묻지 않아도 그곳까지 가겠지, 하는 믿음 같은 게 있었다. 우습게도.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재미있어서 혼자 헛웃음을 웃던 중, 커플 중 한 사람이 캐리어 손잡이가 빠지지 않아 계속 시도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아무래도 고장 난 것 같았다. 버튼을 눌러도 길어져야 할 손잡이가 늘어나지 않았는데, 남은 한 사람은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괜한 참견일까 싶어 계속 지켜보다가, 또 참지 못하고 말을 걸어버렸다! 파워 이이이이이이이, 그리고 관종의 삶이란 이렇게 화려하....다.


'잠시 실례할게요 좀 도와드릴까요?'


일본어로 질문을 하자, 상대방이 괜찮다고 말하려는 듯 웃으시기에 나는 그 자리에 그냥 털퍽 앉아서 '제가 캐리어를 잡고 있을 테니 당겨 보세요!' 하고 일본어로 말해(버렸)다. 아마도 동행이 있었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속으로나 도와주고 싶다! 생각하고 말았지 않았을까...

상대방은 한번, 또 한 번 그리고 세 번 캐리어 손잡이를 당겼다. 그렇지만 미동도 않는 손잡이.

결국은 '요것 좀 잡아 주세요, ' 하고 말하고는 내가 손잡이를 당겨 보았다. 힘을 주는 것엔 자신이 있어서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손잡이는 쉽사리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야 네가 하는 거 헛수고야.' 하고 말하는 것처럼. 짓궂게도.


나는 결국 당기기를 포기하고, 캐리어를 잡는 것도 그만둔 채 '죄송합니다. 아마도 고장 난 것 같네요. ' 하고 말했다. 그랬더니 상대방이 멋쩍은 듯 웃으며 '그렇네요, 감사합니다. ' 하고 인사했다. 여행 마지막 날이신 것 같은데, 긴 거리 이동하실 때 피곤하실 것 같아요. 어쩌지요, 하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쓸데없는 사족이 될 것 같아서였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뭔가 내 마음은 조금 편안해졌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치밀었던 것이 분명하다. 말을 걸지 않았으면 후회했을 거야, 하고 노래를 듣느라 눈을 감고 있는데, 성수역 즈음 도착했을까, 누군가 툭툭 어깨를 건드리는 것이 느껴져서 눈을 떴다. 아까 캐리어를 힘껏 당기던 그 일본분이었다.


나는 '아리가토-' 가 나올 것을 기대했었나 보다. 그런데 그분은 서툰 발음의 한국어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한 후, 정확히 45도 정도의 가벼운 목례를 한 뒤 하차했다. '아니에요, 즐겁게 지내다 가세요!'라고 대답하려던 타이밍을 놓쳐 버려서 문은 닫히고, 열차는 다음 역을 향해 출발했다.


가끔 내가 하려는 배려가,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것인지, 남을 위한 것인지 알아채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전자인 경우는 사실 순수하지 않을 때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진심이 담긴 인사를 받을 때면 아, 말을 걸길 잘했다.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결국 제대로 도움은 되지 못했지만, 그때 받았던 인사만은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앞으로도 2호선을 타거나, 그 역을 지나칠 때면 이 추억을 꺼내볼 수 있겠지.


무튼 그 캐리어의 이후가 궁금해지는 밤이다. 그 캐리어는 잘 귀국했을까?

그리고 귀국 후에 고쳐지거나 버려졌을까? 캐리어 주인은, 또 그 커플은. 일상으로 잘 돌아갔을까? 하는,

여러 가지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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