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합니다, 손으로 쓰는 것이요.

아득해질 , 무언가.

by Sunyeon 선연

손으로 하는 것, 에 익숙하지 않으면서도 손으로 무언가를 쓰거나 적는 것은 좋아한다. 흑연이 뭉특하게 금방 닳곤 하는 연필은 더욱더. 제 몸을 닳게 하면서 내가 힘을 주는 농도로 쓰이는 글자, 글자들은. 말없이 순간을 읊조린다.


오늘은 프롤프롤프롤의 4B연필을 집어 들었다. 조금 길게 깎여버린 흑연 때문인지, 글씨가 적당히 볼드하고 부드럽다. 종이 위에 무언가를 쓴다는 '행위' 는 꽤나 우아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행동 중 하나가 아닐까, 요즘 유난히 생각하게 되는데, 그건 아마도 내가 쓰는 힘을 컨트롤하면서 글씨의 크기나 농도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글씨를 쓸 때는 쓰이는 소리를 듣기 위해 음악을 끄거나 이어폰을 빼고, tv를 끈다. 가만히 자세를 고쳐 잡고 앉아 펜이나 연필을 고른 후 오늘의 자모음이 미끄러질, 마음에 드는 노트를 고른다. 선별작업이 끝나면 자리에 바로 앉아 종이의 한 페이지를 펼친다. 연필로 무언가를 쓴다고 한다면 노트는 응당 180도로 펼쳐지는 것으로 고르게 되더라.

미끄러지듯 채워지는 여백을 보며 종이에 닿는 소리를 커피를 머금듯 음미하는 시간. 바로 지금.

나는 작지만 명확하고 분명하게 평온해진다.


때론 필사하는 것도 좋아한다. 종이책은 읽으면서 필사를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에는 만년필이나 딥펜을 고른다. 잉크를 채워야 할 때도 있지만 딥펜은(dippen) 말 그대로 찍어서 쓰는 펜이라 그날 기분이나 취향에 따라 색깔을 고를 수 있으니 그게 또 매력이다. 마음에 드는 색의 잉크를 골라두고 원하는 닙이 꽂혀 있는 딥펜을 쿡. 찍어 뒷비침이 적은 종이에 시필을 한다. 예전부터 꾸준히 미도리라는 브랜드의 노트를 사용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컴포지션 스튜디오의 만년필용 노트도 좋아한다. 종이가 탄탄하고 뒷비침이 적어 다음 페이지에 기록을 할 때에도 편안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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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ImageeOhf7l.heic 미도리+이로우츠시+이로시즈쿠+세일러




최근, 종이와 펜, 소품 등을 전시해 두고 판매도 하는 '미색종이 전'에 다녀왔다. 익숙한 만년필, 잉크나, 잉크패드 등도 있었지만 모르는 빈티지 연필들과 특이한 시필도구들도 많아서 눈이 즐거워지는 시간이었다. 이미 많은 종이와 차고 넘칠 만큼의 컬러펜을 가지고 있지만 cd를 갈아 끼우듯 종이를 매칭하고 펜이나 잉크를 고르는 즐거움을 아는 나에게는 천국 같은 곳이었다. 결국 나오는 길엔 처음 시필해 본 딥펜과 잉크, 아크릴 스탬프가 담긴 쇼핑백을 들고 있더라.

트롤즈페이퍼,라는 좋은 회사를 하나 더 알게 된 것이 수확이랄까, (좋은 종이로 수첩을 만드는 회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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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현실감각은 조금 아득해지는데 그래서인지 나는, 일상에서 '아득해질 무언가' 하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먹고사니즘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하고 누군가를 만나기도 조금 애매한 오프날 어느 시간대를 '아득해질 무언가'로 채운다면, 어떨까. 때론 별 것 아닐 것 같은 일상도 조금 특별해질 거라 믿는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닿았으면 좋겠다.

현실 감각이 아득해질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무언가, 로 하루의 일부를 채워보는 건,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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