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제목 없는 사진이 갖는 매력.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_ 김춘수, 꽃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에서 불리기 이전의 누군가, 혹은 어떤 것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를 건넨다.
비로소 너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그런 당신이 나에게로 다가와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문득, 또 문득 궁금해지곤 했다.
당신은 처음부터 '꽃'이고 싶었을까, 너는 정말 그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했을까.
내 이름에 호불호가 생기던 순간부터 종종 나는 생각해왔다.
내가 만약 다른 이름을 가졌더라면 무언가가 달라졌을까, 나는 내 흔한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적이 있지 않았나, 아마도 이름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매우 많아지겠지만 나는 한 번도 내 이름이 부자연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그리 불리기로 정해진 것처럼 자연스러웠기 때문이고 늘 그렇게 불렸기 때문에.
생각해보면 정해진 듯 이름이나 제목이 정해진 것들은 처음처럼 그리 되기로 약속한 것처럼 당연스럽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당위성도 품지 않아 외려 생경하다. 내 이름이 지어지는데 나의 본질이나 성질이 포함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물건 또한 마찬가지로 그 물건의 성질이나 본질 자체가 이름이 되는 경우는 없다.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풍경의 어느 일부, 어떤 지역, 우리가 먹고 마시는 어떤 것들의 이름. 전부 사회적 규약에 의해 그럴싸한 이름으로 그렇게 불리기로 언젠가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것이 언제부터 이런 이름으로 정해졌을까, 하는 원초적인 질문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 아무렴 어떨까 그것은 그것으로 불리기로 이미 언젠가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을.
어떤 말을 입술 끝으로 품었다가 반복해서 오래 발음해 보면 그 '이름' 이 그 '이름'인 것 같지 않은 생경함이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유년기의 나는 그 미묘하고 즐겁고 때로는 어색하기까지 한 놀이를 꽤나 자주 즐겨하곤 했다. 그렇게 발음으로 오래 , 진득하게 꺼내놓다 보면 연필이 연필이 아닌 것 같았다. 지우개도 지우개가 아닌 것만 같았다. 익숙한 내 이름을 아주 오래도록 되네어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 묘한 이질감은 나로 하여금 물건이나 사물의 본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그 이름이 그 이름으로 붙여지고 싶었을까, 불려지고 싶었을까 하는. 다소 우습고 조금 근본적인 부분에 대한 합리적이지 않은 의심 말이다.
그렇다면 언어나 텍스트는, 그러니까 정해진 그 무엇은 가끔 삶의 일부분을 딱딱한 무언가로 막아두지는 않던가, 하는 질문을 해 볼 수도 있겠다. 우선 내 생각은 그렇다. 어떤 이름은, 제목은, 혹여 정의된 어떤 것들은 그것이 '그것'이라는 확연한 지시를 함과 동시에 그것이 단순히 그것인 것처럼 의미를 고착화하기도 하니까.
물론 공통된 약속, 법칙, 그것 없이는 누구든 공동생활이 불가능하다. 이를테면 우리 모두에게는 이것을 이것으로 부르기로 하자는 일련의 정해진 약속 같은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니까. 그렇지만 '그것' 이 이미 '그것'이라는 관념이 정해 지면 이미 그 순간부터 다른 면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부분을 생각해볼 때 어쩌면 정의는, 이름은, 제목은, 혹 그것에 대한 정의 등은 단단하고 확고한 질서를 부여하면서 한 방향에는 확고한 울타리를 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 이건 어떨까.
십여 년 전, 처음 시선에 들어온 이후부터 내 시야에 오래 머물고 있는 르네 마그리트의 어떤 그림이다.
“Ceci n'est pas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René Magritte
그림을 보면, 그림의 가운데를 큰 면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저것은 더할 나위 없이 '파이프' 다. 이미 의심의 여지가 없는 그림이다. 그런데 아래 붙은 텍스트를 읽게 되면 그림을 지켜보는 누구든 혼란에 빠진다. 그럴 것이다. 나 또한 그랬고.
'내가 알고 있는 파이프가 맞는데, 이게 파이프가 아니면 대체 뭘 파이프라고 불러야 하나.'
이 그림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그림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텍스트로 하여금, 깔끔한 모순이 성립된다.
아마 더 나아가 생각한다면 '이것이 파이프가 아닌 그 무엇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인가, ' 하는 가정으로 생각을 확장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는 모순 하나를 정확하게 던져 넣고 해석하는 사람들에게 보기 좋은 질문을 던졌다. 그림을 설명하는 텍스트가 그 그림 자체를 어떻게 정의하고 제한하는가. 그리고 텍스트가 설명하는 것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것'에서 벗어나 모순이 될 때 ,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사고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 당연한 듯 당연하지 않은 물음표 하나를 던진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당연히 파이프이면서, 파이프가 아닌 그 무엇일 당위성이 확고하게 성립되는 과정을 거친다.
만약, 그림에 텍스트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누구라도 그것이 그냥 '파이프 그림'이라는 데에 다른 이유를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모순적인 텍스트가 붙음으로써 우리는, 우리 중 누군가는 저건 파이프처럼 생겼지만 파이프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정의된 텍스트에서 조금 멀어진 율동감으로 르네는 칸막이를 없애고 보는 사람에게 그것의 정의를 맡겨두었다. 그 텍스트가 한순간이라도 생명력을 띄었다면, 아마 그것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나는 사진을 처음 시작했을 때를 떠올린다.
그때 나에게 사진을 찍는 순간만큼 중요했던 것은 사진에 어떤 텍스트를 붙일까, 하는 부분이었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어떤 장소, 어떤 사물, 그것을 번호를 매겨 온라인의 어느 갤러리에 업로드할 때마다 나는 설명에 목마른 사람처럼 정성스레 붙일 사진의 제목 등을 공을 들여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러니까 사진에 제목을 붙이는 순간, 그것에 대해 약속된 듯한 정의를 달아두는 순간 그 장면이 그것 의외의 의미를 내포하지 못하고 재미없어지는 순간들을 나는 보았다.
그 장면들은 제목처럼 빛났지만 아마도 제목 이외의 의미는 딱히 품지 못했을지 모른다.
이미지 자체가 이미 많은 정보를 담고 있고, 우리는 늘 그런 이미지들에 파묻혀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기 시작하던 순간, 그제사 제목 없는 이미지들이 사랑스러워지기 시작했다고 한다면 이 사실 자체로도 조금 우스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만약, 같은 공간을 두 사람이 담는다고 하자. 같은 공간을 찍어도 애초에 그 두 장은 다른 사진이다. 그런데 같은 제목이나 같은 텍스트를 붙인다면 그건 또 어떨까,
그것이 그것이라는. 지시 이외에도 장면의 일부를 설명할 수 있는 매우 친절한 사진이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텍스트에는 '그것이 그것이다' 이외의 생각을 제한하는 힘이, 있다.
다시 김춘수 님의 '꽃'으로 이야기를 돌린다.
내 눈 앞에 있는 네가 어떤 존재인지, 나는 제대로 보고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런 면도 저런 면도 가졌구나 한 발짝 더 들어가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미 정해져 있는 이미지들을 한 번씩 더 보듬는다. 너는 어떤 의미이고 싶었을까,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것을 지긋이 관찰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의 이름을 다시 나지막이 불러본다는 것.
나는 오늘 당신을 소리없이 불러 본다.
그리고 당신은 내게로 와 다시,무엇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