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 토마토야.
이를테면 어떤 계절은 어떤 색을 기다리는 마음과 함께 시작된다.
특별한 의미 같은 건 없어 보여도, 시기에 맞춰 알아서 피고 질 풍경들을 누군가들은 기다리며, 또 기대하며 지낸다. 올해처럼 겨울이 유독 춥고 길면 더더욱. 트는 움이 다정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정도와 분수를 아는 마음'을 새기기 위해, 작년에 작은 토마토 화분에 물에 불린 씨를 몇 알 뿌렸다. 한창 따뜻한 기운이 도는 오뉴월을 지나 화분은 꼬박 세 계절을 나와 함께했다. 토마토는 습기와 햇빛에 예민한 친구라 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화분의 흙이 마를 때까지 시간을 두었다가, 일정량의 물을 주는 것은 어색하지 않았지만 내게는 제법 생경한 행동이었다. 씨가 싹이 되었을 때, 그리고 그것이 비로소 하나의 모양이 되었을 때. 나는 매우 기뻤다. 그것은 예기치 않은 행복이었다.
좁은 아파트 베란다에서도 토마토는 잘 자랐다. 뿌리가 점차 단단해지고 모르던 곳에서도 새순이 하나 둘 올라왔다. 나는 그것을 봄을 기다리는 마음처럼 지켜보았다. 긴 겨울을 보내고, 털모자와 모자를 정리하고 코트를 드라이하면서 지난 계절의 냄새가 묻은 옷을 살며시 옷장에 다시 거는 마음으로. 응답하는 마음으로 첫 열매를 보여줬을 때, 꼭지를 어떻게 따야 하나 망설이던 손가락의 온도까지 나는 기억하고 있다. 파아랗게 열매가 올라오고 햇볕에 며칠 두었을 때 새빨갛게 익은 열매를 처음 따던 날. 나는 짐짓 너의 순간들을 이해하고 소통한 기분마저 들었다. 내 손이 닿은 곳에서 무언가가 존재가 되어 그것을 모양으로 받아보는 첫 번째 순간.
똑 , 하고 조심스레 딴 열매를 물에 한번 씻어 입에 넣었을 때 톡. 하고 터지는 그 맛은 확실한 햇볕 맛이었다.
좁은 베란다에서 자랐는데도 누추하지 않은 맛.
달큼하고
단단했다.
나는 너에게 부를만한 작은 이름도 하나 붙여주었다.
가장 싱싱할 때의 사진도 찍어 두었다.
알알이 열매가 달리고, 뒷 열매는 아직 새파랄 때에 제각각 익어가는 너의 순간들의 일부를 지켜보았다.
사진을 본 친구는 그 색깔들이 참 예쁘다 했고
나는 헤헤거리며 웃었다.
뿌리가 제법 단단해져 있었기에, 더 많은 열매를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고
날씨가 쌀쌀해져도 초록빛을 꿋꿋이 지켜내던 너를 위해
옷걸이의 철사를 구부리고, 스티로폼 박스를 구해 작은 온실도 하나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약속한 듯 지나간 겨울. (혹은 아직 지나가고 있는) 은 제법 많이 추웠다.
너무 춥다고 중얼거리던 어느 날. 나는 너를 실내로 들여놓았고,
물론 실내는, 당연하겠지만 원래 네가 있던 그곳보다 빛이 충분하지 않은 환경이었다.
어느 날 너를 유심히 보았더니 작은 열매 두 알이 위태롭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잎은 노란 빛을 띠고 있었다.
물을 주는 것은 평소처럼 했으나, 두 그루 중 한 그루의 뿌리 색이 이전과 다르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눈치채고 말았고 결국 바스락거리던 잎들을 다 따고 나니 누추하게 한 그루의 열매 두 개만 남게 되었다.
작았던 한 그루가 새끼손톱만 한 마지막 열매를 내어놓았을 텐데, 나는 그것이 마지막인 줄도 몰랐다.
하기사, 가끔 마지막 순간 같은 것들은 마지막인 것 같지 않게, 그렇게 찾아오기도 한다.
더 이상 새 잎이 나지 않았지만 나는 마지막 열매 두 개를 따지 않았다.
바스락거리는 잎들을 정리했으니, 습도와 온도 유지를 잘 해 주고
빛이 있을 때에만 통풍 잘 되는 창가에 세워두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아직 살아있다고 믿고 싶은, 일종의 오기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마지막을 조금 길게 끌고 갔다.
평소처럼 물을 주었고, 평소처럼 흙 관리를 했으나
더 이상 열매는 빨갛게 익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설익은 열매는 입에 넣지 않았다.
마지막의 맛이 날 것 같아서였다.
아직 정리하지 않은, 이제는 제법 오래된 뿌리를 바라보며 이제는 화분을 비워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몇 번의 열매를 맺고, 내 손이 너에게 닿는 동안 너는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너의 시간에 대해, 너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았다면 무언가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몰라서 따뜻할 수 있는 시간이 어디 흔한가.
세심하게 신경 쓰되, 무심할 줄도 알아야 하는 식물과 대화하는 시간은
사람을 대하는 시간과도, 제법 닮아 있더라.
지난주엔, 미루었던 씨앗들을 새 화분에 옮겨 심고 새로운 온실에 차곡차곡 두었다.
각자 대화하는 법이 다른 친구들이다.
곧 따뜻한 계절로 접어들 테니, 햇볕 듬뿍 받으며 새 계절을 함께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너의 시간들을 몰라 내가 조금 서툴어.
서툴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할게, 하고 설렁설렁 말을 건네며 물을 주었다.
새 봄엔
떠나갈 것들을 잘 보내고
지킬 것들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슬프지만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