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울 땐 감각의 지점을 옮겨요.

치과 의자에 몸을 눕히다.

by Sunyeon 선연



위이잉,

온갖 세상의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여도 아름다워 지지 않을 것만 같은 소리들과

혀 끝에 얼얼하게 남을 것만 같은 감각들.

이름이 호명되고, 치과 의자에 지잉. 몸을 눕혀 눕는 그 순간은

누구에게든 제법 떨리고 긴장되는 일일 것이다.


상냥하게, 아주 천천히. 무섭게 의자가 내려가고

입을 헹궈낸 후 누우면

초록색 천으로 눈과 얼굴 일부가 가려지고 입만 내어 놓는 상태가 된다.

가려진 내 얼굴이 얼굴다워 보이는지 누운 나도, 혹 치과 의자 어느 모서리에 누울 당신도

보이지 않을 자신의 표정 같은 건 알 수 있을 리 없다.

마치 이모티콘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그 순간 눈을 감으면

차가운 금속성의 소리가 감각을 건드리기 시작한다.

오롯이 감각에만 집중하는 시간들이 시작되는 것이다.



스케일링을 시작한다는 말 뒤에

유난히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치의사가 한마디 덧붙인다.

'앞니는 조금 시릴 수 있어요.'

누운 나는 네, 하고 불완전한 발음으로 대답하면서

이미 앞니가 시리는 것 같은 미묘한 감각에 시달린다.

소리가 양쪽 이를 훑고 지나가는 동안 차라리 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지금 내 이 위에서 내 입 구석구석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을

표정을 알 수 없는 그 치의사의 목소리가

앞니가 제법 시릴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이 시린 감각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생각한다.

위이, 소리가 커지고 나는 잠시 왼쪽 손을 든다.

'많이 시리다.'는 간접적인 표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구석구석 누비는 금속의 시간은 꽤 길다. 치아가 상하지 않았다면 그다지 아프지 않은 시간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감각이 그 앎. 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긴 순간을 곧 끝날 거야, 란 작은 희망으로 내 감각을 틀어막기엔 지금 내 고막을 괴롭히고 있는 그것의 소리가 만드는 감각이 제법 처절하다.

급기야 나는 묘안을 하나 떠올린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던 그 말. 뇌는 한 가지 감각에 집중한다지.

그래서 통증은 다른 감각으로 완화시킬 수 있다는 그 말에 과연, 하고 고개를 끄덕였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제야 얼굴보다 비교적 자유로운 손과 발을 조금씩 움직여보기로 한다.

손톱의 끝을 자근자근 손가락으로 만지거나 발을 까딱거리며 감각을 분산시켜 본다.

아니나 다를까, 치아에만 핀트인 되었던 감각이 몸의 세 부분으로 퍼진다.

뇌의 핀트 지점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 하나에만 집중하던 감각이 분산되니

시렸던 이도 조금 견딜만했다.

내 뇌의 어느 부분을 간질간질, 간지럽힌 것 같은. 놀려먹은 것 같은 묘한 기분도 들어

치과 의자에서 내려서기 전에 제법 뻐근해진 발목을 슬렁슬렁 풀다가 웃음이 났다.

자극을 받는 감각도, 그 감각을 컨트롤하는 것도 결국은 나 자신이지, 싶어서.






버거울 때는 핀트인 된 생각에서 잠시 초점을 돌려둘 만한 것을 찾아보자.



4월은 꽤나 괴로운 일들이 많은 달이었다. 잔인하다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잔인한. 누구에게나 그런 달은 있지 않던가. 평소보다 예민해지거나 털이 곤두서는 것처럼 민감한 상황을 만나거나 '계절을 타는가 봐' 한마디로도 다 퉁쳐지지 않는 일들이 줄지어 일어나는 달이.

좋은 말도 여러 번 들으면 좋은 말이 아닌 것처럼 들리듯, 줄지어 외부 자극에 취약해질 만한 일들을 만나면 해결 여부에 상관없이 스스로의 능력을 깎아먹어 가며 자괴감에 빠지거나, 누구 탓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기도 한다. 하나의 문제에 핀트가 맞추어지면 해결도 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끝없는 고민들이 시작되고 끊임없이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지난달에는 나도 그런 외부 자극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서른 중반 즈음되면 모든 것들에게서 조금 편안해진다고 하지만, '어른이라면 자고로 이래야지.' 란 스스로의 가이드라인과는 상관없이, 심장 가까이에서 부딪히고 깨지고 다시 합쳐지는, 이른바 스트레스 소용돌이에서 카운터 펀치를 맞고도 초연하기는 사실 누구나 쉽지 않다.

그래서 생각했다. 이 자극에서 벗어나는 법은 도대체 무엇일까, 결국 떠올린 것은 핀트인 된 자극에서 다른 사소하고 별것 아닌 일에 핀트를 다시 맞추는 일이었다. 생레몬을 잘라 씨앗을 심고, 한정거장 전에 내려 발자국의 수를 세고, 평소에 하지 않던 일들을 찾아 그곳에 초점을 맞추려 노력했다. 프레임에서 사라지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문제들은 그런 노력들을 하는 동안 조금씩 흐릿해졌다.




자극은 다른 자극으로 마주 보게 하기.


평소에 나라면 하지 않을 일이라면 그런 것도 괜찮다. 아니,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나에게는 괜찮았다.

큰 자극을 받아 그 자극 때문에 얼얼한 상태라도 괜찮다. 말도 안 되는 것일수록 좋지만 꼭 그런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이라도 괜찮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면 근본적인 자극에서 다른 지점으로 자극을 옮기는 것으로 잠시 괜찮아질 수 있다. 물론 내 손으로 어쩔 수 없는 자극에 한해서다. 스케일링을 받으러 간 치과 의자에 앉아서 '저 이가 시리니 스케일링 그냥 안 받을게요.'라고 의자를 박차고 일어날 수는 없으니까.





느끼는 것도 나. 옮기는 것도 나.



스트레스 매니지는 근본적으로 '내가 이렇게 느끼는구나.'를 확실히 인정할 때부터 시작한다는 말이 있다.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하는 감정은 본인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이런 걸 가지고 무슨, ' '이 정도에 화가 나거나 속상한 게 맞는 걸까.'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때에도 감정을 느끼고 인정하는 것은 나 스스로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내가 어느 부분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어떤 부분이 시린지를 금세 알아챌 수 있더라. 어느 감각에서 아픔이 느껴지는지 알 수 있는 것도 나고, 다른 자극을 찾을 수 있는 것도 나다. 아직까지 완벽하지 않은 내 자존감이 '너 이 정도에 화가 나도 되는 거니?'라고 물음표를 찍을 때마다 나는 '나 스스로의 감정을 믿자. 너 그렇게 느끼는구나, ' 하고 여러 번 맞장구를 쳐주려 노력했다.

그러고 보면 어떤 문제를 만드는 것도 나, 그 문제가 문제가 아닐 수 있는 것도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다. 문제가 문제가 되려면 내가 그것을 '문제'라고 여겨야 문제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삶을 발코니에서 관망하지 마세요.

- 교황 프란치스코 -



최근에 읽은 가장 마음에 닿는 말을 공들여 타이핑해본다.

당신과 나의 매일은 과정과, 결과 등으로 이루어지지만,

모든 것은 당신이나 내가 한 선택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결과 또한 나,

당신이 만든다는 말의 반증이다.

내가 나를 더 존중할 수 있길.

당신이 당신을 더 아낄 수 있길.

또 그 아낌의 시작이 스스로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되어 괴로운 순간에도 기꺼이

스스로를 '스스로' 다독일 수 있었으면.

어제까지 잔뜩 뻐근했더라도

그랬구나, 다독이며 뻣뻣한 마음을 슬렁슬렁 풀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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